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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9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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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가기 싫은 12살 정우…높은 지원조례 문턱에 ‘한숨’[간병에 갇힌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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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아동이 가장 취약한데…어리면 못받는 지원

청년센터는 13세·지자체는 9세 이상만 지원

나이 어린 돌봄청년은 실태 파악조차 안돼

편집자주3년 전 22세 청년이 생활고와 간병노동에 내몰려 아버지를 숨지게 한 이른바 '간병살인' 사건 당시 앞다퉈 지원법을 만들겠다 외치던 정치권의 구호는 공염불로 끝났다. 대신 각 지방자치단체가 나서 고령·질병으로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년을 '가족돌봄청년'이라 명명하고 돌봄 지원 정책을 약속했지만, 지원 기준 연령이 되지 않는 아동은 사각지대에 놓였다. 더 이상 돌봄에 내몰려 케어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없기를 바라며 [간병에 갇힌 청춘] 기획을 통해 청춘의 돌봄 노동에 대해 진단하고 나아갈 길을 고민해본다.
"내년에 중학교 가면 어떡하죠?"

12살 정우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4살 어린 동생 신우와 청각장애인 아버지를 돌보는 일이다. 오후 2시40분 하교 후 두 사람을 챙기는 건 정우가 맡은 중요한 일과다. 중학생이 되면 지금보다 늦게 귀가할 테니, 정우는 그때까지 아버지와 동생 단둘이 집에 남는 것이 못내 걱정인 듯했다. 저녁 8시가 넘어서야 퇴근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두 사람의 식사를 챙기는 일도 정우의 몫이다. 정우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능숙하게 가스 불을 켜 물을 끓였다. 자주 먹는 메뉴는 라면과 계란. 어머니가 해두고 간 반찬과 곁들여 먹곤 한다. 부엌 바닥에 놓인 검은 비닐봉지 안에는 라면이 종류별로 가득 들어있었다.

숙제처럼 가족들 끼니를 챙기지만, 정작 정우는 아침을 먹지 않는다. 하루 12시간씩 주 6일 일하는 어머니가 아침식사까지 차리게 하는게 미안해서다. 베트남 출신 결혼이민자인 어머니 트엉 씨(51)는 손두부 맛집으로 유명한 ㄱ식당에서 두부를 굽고, 전골을 끓이고, 그릇을 설거지하느라 온종일 엉덩이 한번 못 붙이며 일한다. 원래는 쉬는 날 하루 없이 매일 일했지만 몇 년 전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뒤 사장이 편의를 봐줘 매주 수요일마다 쉴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벌어오는 200여만원과 남편 정환 씨(65)가 받는 생활비 보조금 67만원 정도가 한 달 수입의 전부다. 정우는 그런 어머니가 안쓰럽다고 했다. "엄마는 아침마다 항상 바쁘니까요. 저는 그냥 아침을 안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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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오후 가족들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정우. 익숙한 듯 냄비에 물을 받아 끓였다. 박현주 기자 phj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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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정우네 집 부엌의 모습. 낡은 벽지가 군데군데 뜯어져 있고, 곰팡이도 있었다. 최근 한 단체의 지원을 받아 리모델링을 마쳤다. 사진 제공 정희선 사회복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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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네 집에 들어서자 구조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좁았다. 부부가 사용하는 안방은 아이들의 옷과 살림으로 가득 차 이부자리를 제외하면 발 디딜 공간이 없었다. 그래도 벽지가 군데군데 떨어지고 난방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던 예전보단 훨씬 나아졌다. 두 달 전 한 단체의 지원을 받아 리모델링을 마친 덕분이다. "이제는 연탄 세 개면 집이 더워서 못 자요. 그래서 요즘은 딱 두 개만." 정환 씨가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자랑했다. 인터뷰를 위해 옹기종기 둘러앉은 거실 바닥에 따끈한 온기가 돌았다. 폼 블록을 붙인 깔끔한 흰 벽은 사흘 밤을 꼬박 새운 부부의 작품이다.

그런데도 정우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괜찮아요"였다. 괜찮다, 힘들지 않다는 말은 정우와 같은 어린 '영케어러'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라는 게 돌봄전문가, 아동단체 종사자들의 설명이다. 보호받아야 할 나이의 아동이 돌봄 책임을 떠맡은 가정은 대개 주거, 소득 등 여러 취약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본인은 이를 객관적으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미 현실을 인식한 돌봄청년들은 분노에 차 있어요. 성장하면서 본인이 짊어진 돌봄 부담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그런데 돌봄청년 가운데 나이가 어린 친구들은 자신의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말해요. 객관적으로 보면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을 뿐 아니라 우울 점수도 굉장히 높은 데도요. 본인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모르다 보니 복지 자원에 접근하기도 어렵죠."(함선유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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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 집 부엌 바닥에 종류별 라면이 가득 든 봉지가 놓여있다. 사진=박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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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는 학교에 1~2등을 놓치지 않는 아이다. 정우가 수학 시험 오답노트를 하고 있다. 사진 박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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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지원 제외"...실태조사 없이 사각지대로 몰린 아이들
영케어러(Young Carer)란 부모의 부양을 받아야 할 나이에 가족·친구 등을 돌봐야 하는 청(소)년 돌봄자를 말한다. 1990년대 영국에서 처음 소개된 개념으로, 국내에는 3년 전 간병살인 사건을 계기로 알려졌다. 정부는 2022년부터 영케어러를 '가족돌봄청년'으로 규정하고 지원을 약속했지만 아직 관련 법안이 없는 탓에 돌봄자에 대한 통일된 정의는 없다. 각 지자체가 지원 조례를 통해 연령에 따라 가족돌봄 아동·청소년·청년 등으로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돌봄청년 지원에 대한 조례를 두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돌봄청년 전담 기관인 청년미래센터에서는 가족에 대한 돌봄을 전담하는 13~34세 청년을 돌봄청년으로 규정한 반면, 각 지자체에서는 그보다 넓은 범위를 적용한다. 하지만 조례가 제각각 만들어진 탓에 돌봄청년에 대한 연령 정의가 통일되지 않았다. 청소년법(9~24세)·청년법(19~34세)의 연령 기준을 바탕으로 서울·인천·전남 등에선 9~34세를 돌봄청년으로 규정한다. 부산·울산 등 지역에 따라 39세까지로 폭넓게 정하는 곳도 있다.

정우가 사는 강원도에서는 가족을 돌보거나 생계를 책임지는 14세 이상 39세 이하인 사람만을 지원할수 있는 돌봄청년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서울·광주 등에선 9세 이상을 지원 대상으로 보지만, 역시 그보다 어린 아동은 지원 목록에서 제외된다. 한부모가정 혹은 조손가정의 경우 돌봄아동이 생계와 간병을 동시에 떠맡아야 함에도 나이 때문에 지원 대상에서 빠지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2023년 4월 서울시의 가족돌봄청년 실태조사를 통해 발굴한 900명 중 36%(326명)가 한부모가정·조손가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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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사정이 비슷한 일본은 최근 9세 이하의 어린 나이부터 가족돌봄을 시작하는 사례가 많다는 점을 인지하고, 지원 정책 마련을 위한 실태조사에 들어갔다. 일본 케어러연맹이 2021년 가족을 돌보는 초등학교 6학년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9세가 되기 전에 가족 돌봄을 처음 시작했다는 응답이 절반에 가까웠다(6세 이하 17.3%, 7~9세 30.9%). 10~12세에 돌봄을 시작했다는 응답률도 약 40%다.

한국의 경우 돌봄청년 중 나이가 어린 아동들은 지원 조례 대상에 포함되지 않으니 실태조사조차 없다. 정부는 지난 19일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24'를 통해 13~34세 청년 인구 중 1.3%인 15만3044명이 가족을 보살피고 있다고 추산했다. 여기에 13세 미만 아동을 더하면 돌봄청년 수는 더욱 늘어나겠지만 정부는 조사를 따로 하지 않아 지원이 누락된 아동에 대한 추정치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 강원지역본부의 정희선 사회복지사는 "자체적으로 돌봄청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는 있지만, 민감한 개인정보에 해당돼 이 데이터를 공공에 임의로 넘겨주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국가 차원에서의 누락된 아동에 대한 전수조사가 이뤄져야 하는 데, 실태 파악을 위한 데이터 확보가 안 되니 제대로 지원하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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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를 이용해 만든 가상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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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돌봄자 지원 정책의 대상을 미취학 아동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손가정에서 돌봄 역할을 하는 청년들의 경우 연령대가 초등학생 혹은 그 이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는 "어렸을 때 부모와 연락이 끊겨 할머니·할아버지에게 맡겨져서 크다가 조부모가 늙으면 아이가 4, 5살 때부터 수발을 드는 경우가 많다"며 "이 아이들은 일반적인 가정에서 자란 경험이 없기 때문에 문제의식을 갖고 도움을 청할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사회 취약층이 될 수 있는 어린 돌봄청년들을 배제하고 지원 정책을 펴는 것 자체가 미흡한 실태조사에서 오는 불완전한 정책이라는 지적이다.

허 조사관은 "돌봄아동 지원 정책의 목표는 이들이 또래와 유사한 환경에서 성장해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며 "아이들이 학업을 중단하거나 부정적인 정서를 가질 정도로 과도한 돌봄을 하고 있다면 그 역할을 국가가 나눠서 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돌봄 당사자와 그 가족들은 신상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다.

박현주 기자 phj0325@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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