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병원에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과 등록을 하고 있다. 연명의료에 대한 평소 의향을 밝혀 두는 문서인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9세 이상 성인이면 누구나 작성해 둘 수 있지만, 작성이 말처럼 쉽지 않다. 전문 사회복지사가 제대로 상담하고 설명하면 한 사람당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
우리나라에서는 2018년 2월부터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됐다. 의학이 너무 발전하면서 환자를 회복시키지는 못한 채 죽음에 이르는 고통스러운 과정만을 연장하게 되자,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법이 만들어졌다. 법 전문에는 이렇게 돼 있다. ‘이 법은 호스피스ㆍ완화의료와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와 연명의료중단 등 결정 및 그 이행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고 자기결정을 존중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취지는 너무 좋다.
법이 만들어지자 관리기관이 생겼고 많은 홍보 자료가 만들어졌다. 홍보 동영상을 보면 내용은 이런 식이다. 백발의 우아하고 멋진 노년의 신사가 예전에 부인을 무의미한 연명의료로 힘들게 보낸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이제는 본인이 몸져눕게 되자 노인은 힘든 연명의료를 하지 말아 달라고 자식에게 당부한다. 자식들은 노인의 뜻을 존중하고, 노인은 호스피스병원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는 가족에게 둘러싸여 편안하게 돌아가신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노인은 밝게 웃으며 자막이 올라간다. 당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KONIBP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홍보 영상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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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의료 결정제도. 홍보물의 영향일까. 2023년 8월 현재 194만1231명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고 30만6815명이 연명의료 중단 등의 결정을 통해 삶을 마감했다. 그만큼 우리의 존엄성은 지켜졌을까? 우리는 그 노인처럼 평온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을까? 내가 봐온 현실 속의 모습은 많이 달랐다.
우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문서를 작성하지 않는다. 죽음은 남의 일이지 나랑은 상관없는 타인의 일이기에 그런 문서에 관심조차 없다. 재수 없게 죽음 운운하다니 말만 들어도 기분이 나쁘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말기 암 환자도 90% 이상은 그런 문서를 쓰지 않는다.
임종이 임박해서야 부랴부랴 호스피스 상담을 하면서 문서 작성이 필요하다고 설명해도 막상 서명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상황을 이해는 했고 써야 한다는 것은 다 알겠는데, 오늘은 서명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룬다. 당연한 일이다. 암이 나빠지는 상황에서 이제 삶이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본디 쉽지 않다.
머릿속으로 생각해 본 상상 속 죽음과 코앞에 다가온 실제적 죽음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의식이 없어질 때까지 연명의료계획서를 쓰지 않다가 결국 임종 며칠 전 직계 가족들이 대신 서명을 한다. 가족들은 이를 ‘부모를 사지로 내모는 문서’ ‘신체포기각서’라고 여긴다. 이들은 내가 내 손으로 부모의 죽음에 서명했다는 죄책감을 가진 채 살아간다. 이게 존엄성일까?
평소 건강할 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한다고 해도 문제가 달라지진 않는다. 그렇게 미리 작성해둔 문서가 막상 임종의 순간에 이르러 효력을 발휘하려면 우선 가족 동의가 필요하다.
" 아니… 엄마는 우리랑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딴 문서를 써 둬서 자식들을 골탕 먹여… 자식이 여럿인데 아프면 우리가 어련히 알아서 안 모실까 봐… 참… 우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
연명의료 논의를 시작하며 평소 어머니가 작성해둔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있다고 이야기하자 중년의 딸은 노발대발했다. 부모·자식 간에 논의와 대화는 없었다. 딸은 “우리 어머니는 치료 다 할 거니까 돈 상관없이 할 수 있는 것 다 해달라”며 연명의료 중단을 원하지 않았다.
세상에 어느 자식이 부모가 곧 죽는다는데 살려 달라고 하지 않겠는가. 의사가 말하는 치료가 연명의료인지, 필수의료인지 일반인이 어떻게 구분하겠는가. 치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시면 무의미한 연명의료이고 그 고비를 넘기고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오면 필수의료이지.
그러니 어떤 일이 있어도 내 몸에 호스 뚫는 거 하지 말라고, 큰 병 걸려서 죽게 생겼으면 나 좀 제발 죽게 내버려 두라고 평소에 자식들 채비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문서는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다. 내가 봐온 현실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있어도 많은 가족이 이를 거부하고 연명의료를 원했다. 가족들이 나빠서가 아니다. 효도라는 이름으로, 최선을 다한다는 이름으로,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현장에서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계속)
“의사 양반, 나 살고 싶어요” 환자들은 사실 죽고 싶지 않습니다.
왜 연명의료를 하지 않겠다며 사인을 했을까요.
연명의료의향서의 불편한 진실은 아래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3602
결국 소변줄 꽂고 기저귀 찬다…어르신 입원 한 달 뒤 닥칠 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8228
“엄마 언제 돌아가세요?” 의사 민망해진 그날 생긴 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0085
‘구구팔팔이삼사’가 최고일까…딸은 노모 죽음 못 받아들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86552
“항암치료 좀 쉬면 안될까요” 죽음 앞둔 72세 마지막 할 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88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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