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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7 (화)

신라 비처왕 편지 속의 국민주권 [인문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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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한국일보

경주 남쪽에 위치한 오릉. 박혁거세와 초기의 왕들이 묻혀 있다고 전해지는 오릉. 사실이라면 이곳은 신라 천년 역사의 태실과 같은 곳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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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시대 서사(敍事)의 주어는 언제나 왕이었다. 역사서에서 그것은 분명히 드러난다.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영웅의 전기로 확인해 보자. 관창, 김영윤, 김흠운 같은 이의 장렬한 죽음 끝에 늘 '왕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포상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왕조시대이니 당연하다. 영웅도 왕을 위해 존재한다.

왕조시대에 왕을 얼마나 절대적으로 여겼는지 삼국유사에도 적절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라 비처왕은 5세기 후반의 왕이다. 바야흐로 신라가 나라의 꼴을 갖춰가던 무렵이었다. 어느 날 행차 중, 까마귀가 쥐와 함께 왕 앞에 와서 짖는데, 쥐가 사람처럼 '까마귀가 날아가는 곳을 따라가라'고 말한다. 말 탄 병사가 쫓아갔고 남산 아래 이르렀더니, 마을의 연못가에서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었다. 병사가 싸움 구경하며 한눈파는 사이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다.

그때였다. 한 노인이 연못 가운데에서 걸어 나와, 겉봉에 '뜯어서 보면 두 사람이, 뜯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고 쓰인 편지를 주었다. 불가사의한 일의 절정이다. 병사가 돌아와 왕에게 바치자, 짐짓 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야···' 하며 뜯지 않으려고 했다. 그때 측근의 신하가 말했다. "두 사람이란 일반 백성이요, 한 사람이란 왕입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더 이어지고 다른 여러 해석을 낳는다. 다만 이 장면, 백성보다 왕을 살려야 한다는 신하의 단도직입에 주목해 보자. 수효만 놓고 보면 희생은 적을수록 낫겠다는 생각에서 어진 왕은 봉투를 뜯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왕이라면? 왕 아니라 누군들 기꺼이 죽겠다 나서겠는가만, 이 우화의 무대는 왕조시대다. 아주 당연히 한 사람 곧 왕이 살고 두 사람 곧 백성이 죽어야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왕조시대의 왕은 그만큼 절대적이고 언제나 주어였다.

기실 이는 왕이 잘나서가 아니었다. 왕은 곧 나라라 생각했고, 왕의 건재가 곧 백성의 안전을 담보한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왕조시대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시대에 문법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왕의 자리에 국민을 바꿔 넣어야 한다. 국민이 주어여야 한다. 국민이 곧 나라이고, 나라를 위한다면 곧 국민을 위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로만 그럴 뿐 왕처럼 사는 사람과 그 추종자가 여전히 있다. 오랜 왕조시대의 못된 버릇을 이어받아선가? 손바닥에 왕(王) 자 대신 가슴에 민주공화국의 헌법을 써야 했건만, 할(喝).
한국일보

고운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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