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35화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송두율 교수의 둘째 아들 송린씨가 2004년 3월10일 오전 국회 앞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는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오른쪽은 송 교수의 부인 정정희씨.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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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는 2002년 9월16일, 위원회 출범 이래 2년간 85건을 조사해 그 결과를 발표했다. 각하하거나 취하한 사건 3건을 제외한 82건 가운데 민주화 운동과 관련 있는 죽음으로,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사망했다고 인정된 사건은 19건이었다. 중앙정보부 조사 중 투신자살로 발표된 서울대 교수 최종길,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관련 수감 중 숨진 장석구, 강제징집 뒤 휴가를 나왔다가 귀대 직후 사망한 정성희, 청송보호감호소에서 교도관 폭행 등으로 사망한 박영두 등이었다. 이는 은폐와 조작으로 어둠 속에 깊이 묻혔던 사건의 진실이 드러난 사례들이다.
하지만 30건은 진상규명 불능, 33건은 기각으로 처리했다. 진상규명 불능은 그때까지의 위원회 조사로는 공권력의 부당한 행위로 인한 죽음이라는 인과관계를 밝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각된 33건은 민주화 운동 관련성이 없다는 이유 등이었다. 2003년 7월에 제2기 의문사위가 재가동되었지만, 이런 문제들은 해결하지 못했다.
의문사위 이은 진화위의 성과와 한계
민주화 운동과 관련 없이 ‘국가폭력=국가범죄’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하게 된 것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제정되어 시행된 2005년 이후다. 이 법에 따라 설립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약 5년 동안 일제 강점기 때 국내외에서 벌인 독립운동, 해방 이후부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 사건, 권위주의 통치 시기의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 등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게 된다. 이명박 정권 때 활동이 중지되었지만, 2020년부터 제2기 진화위가 재출범하여 2025년 5월까지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그런데 이런 진화위 활동으로 과연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할 수 있을까?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국민통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하지만, 한시적인 조사기구로는 많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 반인권적이고 뉴라이트적인 시각의 인사들이 위원장과 위원으로 들어와 오히려 사건을 왜곡하고, 피해자들에게 2차 피해를 주는 일도 발생하고 있다. 권위주의 독재 시기에서 민주주의 시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정의를 세우는 일은 아직도 미완성이다.
나는 2002년 12월 제1기 의문사위가 활동을 종료하면서 인권운동사랑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해 12월에는 ‘미선이·효순이 사건’으로 시민들이 광장에 촛불을 들고 모였고,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인권운동사랑방으로 돌아오면서 다시는 공무원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공무원은 내게 맞지 않는 옷이라는 생각이 짙어졌고, 나는 인권현장을 지키는 운동가로 살겠다고 다짐했다. 이후에도 과거사 기구들이 설립되어 요청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2003년에 교육부가 나이스(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를 전면 시행하려고 해서 이를 저지하는 싸움도 벌였고, 사회보호법 폐지 운동에도 참여했다. 그해 가장 큰 사건은 아마도 이라크 파병 문제일 것이다. 파병 반대 투쟁에도 함께했다.
송두율 사건, 국가보안법 논쟁 불붙이다
2003년 9월에 독일에 있던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송두율 교수가 부인 정정희씨와 함께 37년 만에 방한했다. 그는 여러차례 방북을 했던 전력이 있어서 오랫동안 한국 땅을 밟지 못하다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이 주선해서 귀국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오자마자 ‘해방 후 최대 거물 간첩’, ‘가짜 교수’로 보수세력들에 의해서 마녀사냥을 당했다. 그는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몰려서 구속·기소되었다. 1심 재판부는 대부분의 혐의를 인정해서 7년 형을 선고했다.
그렇지만 2004년 7월, 2심 재판부는 대부분의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다만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있던 시기에 방북을 한 부분만 유죄로 인정하여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최종적으로는 2008년 7월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5년 확정) 송 교수의 귀국에서 석방까지 10개월 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 한계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국가보안법이 유지되는 한 사상과 양심의 자유, 학문의 자유에 대한 보장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되었다.
30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인권단체 연석회의 대표들이 2004년 7월13일 오후 과천정부청사에서 국가보안법, 사회보호법 등에 대한 개정 의견서를 전달하기에 앞서 강금실 법무부 장관(왼쪽 끝)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부터 박숙경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팀장,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최서연 원불교 서울외국인센터 소장, 장주영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총장, 이창수 새사회연대 대표.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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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천주교인권위원회, 인권운동사랑방 등의 인권활동가들은 2004년이 시작되자마자 그해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의 정세가 열릴 것을 예상하고 ‘국가보안법 팀’을 구성했다. 이 팀에서 논의된 내용들을 민변 변호사들과 민주주의법학연구회의 학자들이 정리해, 그해 8월9일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해설서 ‘국가보안법을 없애라’ 발간 행사를 열었다. 이 팀은 2004년 하반기 국가보안법 폐지 논의 국면에서 정책팀 구실을 톡톡히 해낸다.
2004년 국가보안법 개폐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된 계기는 그해 4월15일에 열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였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채 진행된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고, 민주노동당이 10석을 얻게 된다. 총선 직후 한겨레는 의원 당선자들을 상대로 국가보안법 개폐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이 설문에는 국회의원 당선자 299명 중 269명이 응답했다. 설문조사 결과 국가보안법의 일부 개정 58.7%, 폐지 29.0%로 국가보안법의 개폐에 찬성하는 국회의원 당선자가 87.7%로 나타났다.
8월24일, 국가인권위원회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 인간의 존엄성을 해할 소지가 크며, 형벌 법규로 의율이 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어서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법무부 장관과 국회의장에게 권고했다. 9월5일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낡은 유물은 폐기하고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는 게 좋지 않겠느냐”며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역설했다. 이어 열린우리당은 10월17일에 열린 의원총회에서 형법 보완을 전제로 한 국가보안법 폐지를 당론으로 결정했다.
이렇게 이전과는 다른 국면이 열리고 있었다. 이전에도 국가보안법이 중심 이슈로 떠올랐던 때가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9년 8·15 경축사에서 “변화하는 남북관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국가보안법도 개정할 것입니다.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도 고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김 대통령의 이런 발언은 소강상태에 있던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을 움직이게 했다.
국가보안법 7조 삭제 운동
새로운 국면이 열리는 것에 맞춰서 인권운동사랑방은 국가보안법의 전면적인 폐지를 주장하기보다는 제7조의 완전한 삭제가 관건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제7조(찬양·고무등) ①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북한은 반국가단체이고, 정부의 정책이나 방침에 반하는 주장을 펴는 것은 반국가단체의 주장을 찬양·고무하고, 동조하는 행위이므로 처벌되어야 한다. 이런 행위를 하는 단체는 이적단체로 처벌되어야 하고(제7조3항), 이른바 불온서적을 소지하고 배포하는 행위도 처벌되어야 한다(제7조5항)는 내용이다. 매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00~500명이 구속되던 때였는데 이들 구속자의 95%가 제7조 위반이었다.
국가보안법 제7조의 삭제에 동의하는 115개 단체는 1999년 8월20일 ‘국가보안법반대국민연대’를 창립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고문으로 참여하신 리영희 선생님은 “최고강령만을 주장할 때 운동은 패배를 경험하기 쉽다. 현 시점에서 우리의 역량이 부족하다면 가능한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제7조 삭제운동의 의미를 강조하셨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은 폐지만이 답이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견지하는 단체들은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를 결성했다. 폐지연대에 참여한 쪽은 인권운동사랑방이 운동 대오를 분열시키고 있다고 엄청 비난했다.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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