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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0 (금)

25년 전 남편 잃고 시작한 자살예방 상담…2만시간 '봉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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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전화' 상담원 김귀선씨, 술주정도 들어주며 목숨 살려

연합뉴스

자살 예방 상담하는 '봉사왕' 김귀선씨
(인천=연합뉴스) 손현규 기자 = 지난 6일 인천시 미추홀구 간석동에 있는 인천 생명의전화 상담실에서 김귀선씨가 상담 전화를 받고 있다. 2025.1.9



(인천=연합뉴스) 손현규 기자 = 인천에 사는 김귀선(68·여)씨는 25년 전인 1999년 겨울, 하루아침에 백화점 건설 현장에서 남편을 잃었다. 새벽에 이층집 현관문을 나서며 평소와 다르게 "오늘은 출근하기 싫다"던 남편에게 "그럼 일찍 퇴근하라"고 위로한 날이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6시간이 지난 오전 11시쯤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수화기에서 "그 집 아저씨가 다쳤다"는 낯선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지인 차량을 얻어타고 급히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치료실이 아닌 영안실에 누워있었다. 몸도 이미 싸늘하게 식은 상태였다.

기가 막혔다. 김씨는 어떻게 장례를 치렀는지도 제대로 기억 못 할 정도로 힘들었다. 6개월 넘게 밤마다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남편이 건설 현장에서 벌어온 돈으로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인 큰딸과 중학교 3학년인 작은 아들을 뒷바라지하던 김씨는 졸지에 가장이 됐다.

남편이 있을 때는 집, 교회, 시장밖에 몰랐지만 이제는 김씨가 남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애들 아빠는 생활력이 엄청 강했어요. 월급을 타면 봉투째로 줬습니다. 그때 모아둔 돈에 사망 보상금으로 겨우 버텼습니다."

밥벌이를 고민할 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씨의 친정 식구들은 "이제는 조금만 쓰면서 봉사하는 삶을 살아보라"고 조언했다.

그 조언대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할 무렵 우연히 지인이 "인천 생명의 전화라는 곳이 있다"며 봉사할 곳을 소개했다.

김씨는 시민 상담대학에서 상담이론교육을 받고 실습까지 한 뒤 자살 예방전화 상담원이 됐다.

1주일에 주말 하루 포함해 4차례 오전 5시 30분부터 점심 무렵까지 상담 전화를 받았다.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 개인사를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욕설부터 하며 시비를 거는 사람도 많았다.

연합뉴스

2만시간 '봉사왕' 김귀선씨
(인천=연합뉴스) 손현규 기자 = 지난 6일 인천시 미추홀구 간석동에 있는 인천 생명의전화 상담실에서 김귀선씨가 상담 전화를 받고 있다. 2025.1.9



"하루는 경찰서라면서 전화가 왔는데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다고 바꿔줬습니다. 아내와 자식까지 모두 등지고 사는 60대 남성분이었어요.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죽으려고 했는데 전화는 무슨 전화냐고 화를 내더라고요."

김씨는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다 하시라"며 귀를 열었고, 삶이 힘든 중년남성의 신세 한탄을 끝까지 들어줬다.

"속이 후련했는지 나중에는 혼자 막 웃으시더라고요. '살다가 힘들면 몇번이라도 전화해도 괜찮다'고 했더니 '정말 고맙다'면서 '아줌마가 날 살렸다'고 합디다. 그게 그렇게 뿌듯하더라고요."

2003년부터 시작된 그의 자살 예방 상담 봉사는 중간에 과로로 쓰러져 쉰 두 달을 제외하고 올해까지 23년째 이어졌다.

누적 2만 시간을 넘겼고, 지난해 12월 인천시청에서 열린 자원봉사자의 날 기념식에서 그는 '봉사왕'으로 선정됐다.

2만 시간은 매일 4시간씩 14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봉사해야 채울 수 있다.

인천 생명의전화 사무국에서 일하는 이윤정(39·여) 사회복지사는 "눈이 너무 많이 내린 날 아침에 '오늘은 상담실에 안 나오셨겠지'라고 생각하며 출근해서 보면 김 선생님은 꼭 나와 계신다"며 "자발적으로 20년 넘게 봉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정말 대단하시다"고 말했다.

같은 상담 봉사를 하는 박현자(60·여)씨도 "김 선생님은 상담 기술이 좋아 시민 상담대학을 수료하고 처음 오는 자원봉사자들에게도 친절하게 노하우를 알려주신다"며 "책임감이 뛰어나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9일 "남편을 사고로 한순간에 잃고 너무 힘들었는데 20년 넘게 봉사하면서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해졌다"며 "죽고 싶은 분들과 대화해서 마음을 고쳐먹게 했을 때 보람이 정말 크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집에서 상담실까지 매번 버스를 타고 다닌다"며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건강만 괜찮다면 앞으로도 계속 봉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s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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