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어떤 도사도 항상 머리맡에 사람 해골바가지를 두고 잠자기 전에 108번을 손으로 쓰다듬는 것이 일과였다. “해골은 어디서 구했냐?” “공동묘지에서 하나 굴러다니기에 집으로 가져왔다. 해골을 손으로 만질 때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이치가 이 해골에 있다. 원효 대사도 해골바가지 물 먹고 깨쳤다”. 좀 더 과격한 백골관은 사람 시체 옆에서 1~2년 생활하는 것이다. 매일 시체가 썪는 냄새도 맡고, 점차 부패해서 백골만 남는 전 과정을 지켜보면서 명상에 잠긴다. “결국 백골만 남을 것을! 이 몸뚱이 가꾼다고 건강검진 열심히 받고, 영양제 먹고, 줄기세포도 하고, 피부 마사지 받느라고 돈 많이 썼구나!” 신라의 자장율사(590-658)가 이 백골관을 해서 깨침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강원도 영월 법흥사에 가면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 적멸보궁 뒤편에 가면 입구가 좁은 둥그런 형태의 석분(石墳)이 있다. 언뜻 보면 무덤같이 생겼다. 자세히 보면 조그만 입구가 있다. 기어서 들어가야 하는 이 좁은 공간의 석분은 자장율사가 들어가서 백골관을 닦았던 수행터가 아니었나 싶다.
깎아지른 절벽 200~300미터 꼭대기에 있는 메테오라의 그리스 정교 수도원들. 외부 세계와 철저한 단절을 위해 이 절벽 꼭대기에 수도원을 지었다. 건물 입구 들어가는 현관 신발장 같은 곳에 사람 해골 30~40개가 차곡차곡 진열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건물에 들어가는 사람 누구나 볼 수 있는 위치에 해골이 놓여 있었다. 그 수도원에서 도 닦다가 죽은 선배 수도사, 수도원장들의 해골이었다. ‘기독교 수도사들도 백골관을 했구나’를 알게 되었다. 유럽 문화에 깊이 박혀 있는 ‘메멘토 모리’(너의 죽음을 기억하라)의 심벌은 백골이었다.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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