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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4 (금)

[유라시아 횡단 도전기] <22>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과 명나라 서안(西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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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깊은 명나라 시대 '평요고성'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서안(西安)으로 향한다. 중국 내몽골로 입국 후 편안한 자동차 여행을 즐기고 있다. 서안(西安)은 '관중평야' 중앙에 자리 잡은 '섬서성' 성도(成都) 이다. 오늘은 500여 킬로를 남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평요 근처 고속도를 달리면서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가의 하나인 '왕가대원(王家大院)'을 얘기한다. 두부 장사로 돈은 번 청나라 4대 부자의 하나인 '왕씨 형제'의 자손이 모여 사는 600년 역사의 집성촌이다.

집성촌 울타리는 10미터 높이 거대한 성(城)을 쌓아서 만들었다. 성안에 청나라 양식 가옥 1100 여채, 정원 120 여개, 왕씨 자손 5천 명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면적이 4만 5천 평 규모로 평요의 유명한 관광지의 하나이다. 청나라 대부호의 동족(同族) 마을 방문은 시간상 가지 못함이 아쉽다. 서안으로 남하하면서 왕복 8차선 고속도로에 차들이 많이 다니고, 서안 근처는 왕복 16차선 고속도로이다. 광활한 '관중(關中) 평야' 지역이다.

중국 역사는 황하강 중류 '관중(關中) 지방'과 황하강 하류 '중원(中原) 지방'의 정치적 대결의 역사이다. 중원(中原) 지방은 물산이 풍부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롭다. 하지만 정치권력 창출은 관중이 중원을 압도했다.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는 관중에 기반을 두고 있다. 현재 시진핑 주석도 관중 출신이다.

서안성의 자동차 출입 성문. [사진=윤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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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 평야에 옥수수밭이 끝없이 이어진다. 옥수수는 식용유, 사료, 바이오연료, 가공식품 등 다양한 수요가 있는 작물이다. 중국 사람은 '책상다리' 빼고는 모든 것을 튀겨 먹는다는 유머가 있다. 엄청난 식용유 수요와 식재료인 돼지와 오리를 키우는 데 필요한 것이 옥수수이다. 서안 200킬로 못 미쳐서 중국의 어머니 강 '황하강' 다리를 통과한다. 서안(西安)은 황하가 흐르지 아니하고, '위수(渭水)' 등 여러 개의 지류가 지나간다.

내가 타고 있는 차의 계기판에 '엔진 점검' 경고등 불이 들어온다.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 서안 외곽 정비소에 들렀다. 정비소 여직원이 차량 점검하는 동안 아이스크림을 가져다주는 등 친절하다. '엔진 경고등'이 왜 켜지는지 원인을 모르겠다고 한다. 시내 더 큰 정비소에 가라고 해서 서안에 도착 다음 날 정비소 갔는데 역시 이유를 모른다. 서울에 가야 고칠 수 있을 것 같다. 타클라마칸 사막, 파미르고원 등 남은 험난한 코스를 무사히 통과하기를 기도할 뿐이다.

얼마 전까지도 "장안(長安)의 명물, 장안(長安)의 화제"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한자 '안(安)'자는 '평화'라는 의미로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은 '장구한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500여 킬로를 달려 오후 늦게 중국의 천년 고도(古都) 장안(長安)에 도착했다. 북위 54도 시베리아에서 북위 34도의 서안으로 10여 일 만에 3천여 킬로를 자동차로 내려온 셈이다. 내륙도시 장안의 7월 하순 날씨는 습도가 매우 높고 무덥다. 기름기 많은 중국 음식, 늦은 시간 저녁 식사, 장시간 자동차 운전 등 소화불량이 심하다. 정로환, 소화제를 매일 먹고 있다.

'서안(西安)' 명칭은 1370년 명나라가 몽골족의 원나라를 쫓아내고 성(城)을 재건할 때 '서경(西京)'(서쪽 수도)과 '장안(長安)'의 앞뒤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장안은 중국 13개 왕조(진, 한, 수, 당나라 등)가 수도로 삼은 역사가 겹겹이 쌓인 도시이다. 서안성 성문을 통과하여 시내로 진입하였다. 우리 호텔은 시내 '회족(回族)'거리 근처에 있다.

당나라 장안성의 길이는 35킬로로 성내에 100만 명이 살았다고 한다. 장안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구분하여 지었는데, 당나라의 내성(內城)이 현재의 서안성이라고 한다. 명나라가 만든 현재의 서안성 내부 면적은 당나라 시대 장안 면적의 1/10 규모이다. 국제도시 장안성의 서쪽에는 외국 물품을 파는 '서시(西市)'가 있고, 동쪽은 중국 물품을 파는 '동시(東市)'로 구분했다. 장안성 '서시(西市)' 시장은 서역 실크로드 상인의 종착지이다.

서안에 남아있는 당나라 시대 건축물은 현장법사를 위해 세운 '대안탑, 소안탑' 뿐이다. 명나라 시대 건축물은 '서안성과 종루'이다. 현재 성안은 고층빌딩, 고층아파트, 명품가게, 맥도널드 식당 등 초현대식 건물로 가득 채워져 옛날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1400년 전 당나라는 아시아 대륙의 '중심국'이다. 당나라 수도 장안은 세계 최대의 국제도시였다. 중앙아시아에서 온 소그드인, 이란에서 온 페르시아인, 유대인, 인도인, 신라인, 베트남인, 일본인도 이곳에 왔다. 신라의 의상대사, 혜초스님, 최치원 선생도 장안을 다녀갔을 것이다.

서안성 성곽 위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윤영선 심산기념사업회 회장 부부. [사진=윤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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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는 외국인을 위한 과거시험인 '빈공과'를 만들어 외국인에게도 공직 문호를 개방했다. 신라의 '최치원' 선생은 859년 12살의 어린 나이에 사비(私費)로 당나라에 유학을 왔다. 최치원은 당대로 천재였던 같다. 아버지는 떠나는 아들에게 10년 내에 과거시험 '빈공과'에 합격하지 아니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최치원은 아버지 기대대로 7년 후 19살 나이에 '빈공과'에 수석 합격했다. 신라인 중에서 약 40 여명의 빈공과 합격자가 기록에 있다.

최치원 아버지는 6두품 출신으로 12살 어린 아들을 멀리 당나라로 유학 보낸 대단히 성공지향 사람이다. 아마 당시 당나라 장안에 많은 신라인이 살고 있어서 어린 소년 최치원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공부를 가리키는 선생님도 수배해 줬을 것이다. 변방의 신라가 훌륭한 문화를 창조한 데는 최치원 아버지 같은 사람의 교육열 때문일 것이다.

1300년 전 당나라에 유학 온 신라인 중에는 스님도 매우 많다. 고대에 스님은 최고의 지성인이자 국제적 안목을 가진 선각자들이다. 신라의 원효스님(617년생), 의상스님(624년생)은 불문(佛門)의 사형제 관계이다. 두 사람은 함께 당나라로 구법(求法) 유학을 출발했다. '원효'는 당진항으로 가는 도중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다'를 깨닫고, 유학을 포기했다.

'의상 대사'는 661년 중국에 유학, 670년 귀국하여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영주 '부석사'는 신라로 돌아가는 의상 스님을 사모하는 '선묘낭자'의 설화로 유명하다. 서안성 성곽 위로 올라갔다. 입장 티켓(54위안. 원화 약 1만원)을 사고, 티겟 살 때도 여권을 제시해야 하니 관광이 불편하다. 서안성의 위쪽 폭은 자동차 4대가 동시 다닐 정도로 넓다.

서안성을 축성한 명나라는 몽골족의 침략을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성곽의 규모를 보면 알 수 있다. 엄청난 재정과 노동력을 투입했을 것이다. 나와 아내는 서안성 위를 산책하며 성 주변의 구경을 즐긴다. 성 위의 노점상에서 아이스크림도 사 먹으며 고성의 여유를 만끽한다. 성 위에 자전거 빌려주는 가게가 많고, 많은 기념품 노점상, 간식 가게도 많다. 성벽 위 12킬로는 자전거 타기에 좋은 코스이다. 서안은 전기차가 많이 보급되어서 대기질이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1300만 명 주민이 살기 때문에 교통체증이 심하다. 시민들은 4거리마다 CCTV가 사진을 찍기 때문에 교통질서를 잘 지킨다.

서안에서 우리는 하루 쉬면서 고대 유적을 둘러보기로 했다. 서안 동쪽에 있는 진시황 병마용을 보기 위해 아침 8시 출발한다. 숙소에서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웬걸 인산인해이다. 여름방학이라 전국 각지에서 초등학생과 학부모, 조부모 등 가족 동반 여행객이 미리 도착해서 줄을 서있다. 1974년 농부가 발견 후 벌써 50년이 지났다.

진시황제 무덤, 병마용. [사진=윤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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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손된 병마용을 과거보다 상당히 복구한 것 같다. 만만디 국민성답게 앞으로도 수십 년은 더 걸려야 부서진 병마용의 복구 공사가 완성될 것이다. 나는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세계 유수 관광지 모두가 'Over Tourism'으로 고통을 받는데, 이곳이 최악의 인구과잉 관광지이다. 1인당 입장료가 180위안(우리 돈 3.5만원)으로 과거보다 많이 올랐다. 중국인 4인 가족의 경우 약 14만원으로 비쌈에도 관광 인파가 매우 많다.

표를 산 다음 '전기 카트'를 타고 5분 이동한다. 카트에서 내려서 한참 걸어가야 한다. 그리고 입장하는데 두 시간 이상 걸린다. 병마용 건물 내부에 들어가면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밀려다닌다. 우리는 일행이 서로 갈라져서 일시적으로 이산가족이 되었다.

병마용 근처에 진시황제 무덤이 있다. 진시황제의 무덤은 생전부터 만들었던 높이 88미터의 거대한 토산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지하에 수은이 흐르는 강이 있고, 침입자에 대한 살상용 장치가 있다. 수많은 처첩, 시녀가 순장되었다. 미래 과학기술이 발전할 때까지 개봉하지 말라는 '주은래' 수상의 지시로 진시황제 무덤은 발굴 공사를 하지 아니하고 있다.

진나라는 진시황제 사후 10년도 못 되어 망한다. 천하통일이 정점(頂點)이자 멸망의 시작이다. 역사가 사마천은 진나라 단명(短命)에 "성공에 취하면 망하고, 사람을 얻으면 흥한다"고 사기(史記)에서 기술했다. 중국을 뜻하는 영어 China 단어는 진나라 'Chin'(진)에서 유래되었으니, 진나라 이름은 영원히 지속되고 있다. 사마천은 통찰력 넘치는 역사가이다.

"공을 얻기는 어려우나, 패하기는 쉽다. 때를 얻기는 어려우나, 놓치기는 쉽다. 성공의 그늘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단호하게 행동하면 귀신도 피한다"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는 사기(史記)에 나오는 명언들이다. 인산인해의 병마용을 관광하면서 더운 여름 날씨에 땀으로 옷이 흠뻑 젖었다. 시내 중심가 명나라 시대 유적인 '종루' 옆 만두전문점 '동아반점'에서 만두 코스로 점심을 먹었다. 12종류의 만두가 코스로 나오는데 우리는 양이 작아서 조금밖에 못 먹었다.

현장법사 동상과 뒤쪽의 대안탑. [사진=윤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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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현장법사 유적이 있는 '대안탑과 자은사'에 들렸다. 현장은 당 태종 때 승려로 17년 동안(629~645년) 인도를 다녀와서 '대당서역기'를 쓰고, 귀국 후 많은 불경을 번역한 위대한 승려이다. 천축 출발 당시 임금은 당 태종인데, 서쪽의 돌궐족과 당나라가 전쟁 중이라 외국으로 출국을 금지하고 있었다. 현장은 26살의 나이에 629년 장안을 몰래 출발하여 인도로 향한다.

현장은 대단한 기억력과 메모광이다. 머물거나 도착한 곳에 대한 정보를 간략히 메모하고 기억했다가 대당서역기에 상세하게 적어놨다. 본인이 직접 보고 들은 것뿐만 아니라 여행 중 남에게 들은 것도 꼼꼼히 기록하였다. 현장은 645년 천축에서 불상, 불경. 사리 및 중국에 없는 귀한 물품 등 520상자를 가지고 귀국했다. 몰래 출발할 때와 달리 귀국 당시 당나라는 돌궐을 멸망시키고, '정관의 치'를 만든 당 태종이 재직 중이다. 당 태종은 현장에게 벼슬을 내리겠다고 하지만 현장은 거절한다.

당 태종은 대단한 안목의 인물이다. 현장에게 17년 동안 여행기를 기억이 있을 때 완성토록 명령하여, 대당서역기를 완성하였다. 현장이 기술하고, 제자 '변기'가 받아 써서 3년 만에 완성된 책이 '대당서역기'이다. 1400년 전 135개 오아시스 국가의 기록을 남겨서 오늘날 과거의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 지역, 파미르고원 사람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문명사적 대기록은 당 태종의 안목 덕분이기도 하다.

현장이 죽을 때까지 불경 번역에 전력을 다하여 중국과 동아시아 불교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현장 스님은 위대한 승려이자 대 모험가, 저술가이다. 현장의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당 태종의 아들인 고종이 649년 '대안탑'을 건립하고, 죽은 어머니 기원을 위해 '자은사'를 건설하였다. 1400년 역사의 풍랑을 이겨내고 당나라의 중요한 유물로 현재까지 남아있다.

초등학생 시절 감동을 주었던 소설 '서유기'(명나라 오승은 소설)에서 현장법사는 '삼장법사'로 나온다. '삼장'은 세 가지 불법 '경장. 율장. 논장' 3장에 능통하다는 불교계 최고 찬사이다. 당나라는 종교도 개방적이어서 오랑캐 3대 종교라고 부르던 '조로아스터교, 기독교(경교), 마니교' 등을 자유롭게 믿도록 허용하였다. 당나라 말기 845년 당 황제는 종교탄압을 실시하여 불교를 비롯한 서역의 3대 종교도 금지하였다. 다만 몇 년 후 불교는 허용했지만, 서역에서 온 3대 종교는 해제하지 아니해서 중국에서 사라지게 된다.

'비림(碑林)' 박물관에 당나라 781년 만든 기독교(경교) '대진사 비석'이 있다. 17세기 청나라에 포교하러 온 예수회 선교사들이 비석의 기독교 포고 탁본을 보고, 자기보다 천 년 전에 포교하러 온 사실을 알고 매우 놀랐다고 한다. 비림 박물관은 휴관일이라 들어가지 못했다.

회족 거리 먹자골목 야경. [사진=윤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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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회족(回族) 거리로 갔다. 재래시장 뒷골목인데 사람이 매우 붐빈다. 노후화된 재래식 건물이 많이 남아서 초현대적 도시 서안 시내 모습과 대비된다. 양고기 꼬치구이를 굽는 매캐한 연기와 관광 인파가 생동감이 넘친다. 이곳의 특산물인 생소한 '뼝뼝면'을 시켰다. 한자 '뼝'자는 한자 획수가 가장 많은 희소한 글자라고 한다.

음식 이름도 신기하고, 간판도 많아서 먹었는데 매콤하지만 비벼 먹는 음식 맛이 괜찮다. 뼝뼝면 값은 30위안(5800원)으로 매우 저렴하다. 양꼬치 굽는 향기에 이끌려 샤슬릭 식당에 들렸다. 작은 양꼬치 10개에 30위안이다. 맥주 안주로 최고인데,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 식당은 술을 안 판다고 한다.

회족(回族)은 당나라, 원나라, 명나라 시대에 중국에 온 아랍 상인, 페르시아 상인들의 후손이다.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장사하러 와서 눌러 않은 상인의 후손이다. 중국 전체에 약 1000만 명이 살고, 서안에도 약 6만 명이 산다고 한다. 회족은 완전히 중국화 되어 신장위구르 지역의 이슬람교를 믿는 위구르족과는 다르다.

하루 종일 서안 시내를 돌아다녔다. 유럽인, 미국인, 일본인 등이 거의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유럽인들이 중국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서안과 돈황이라고 들었다. 중국과 미국의 무역전쟁, 코로나19 발생, 중국의 엄격한 간첩법 시행 등 여러 원인에 기인한다는 생각이 든다.

윤영선 법무법인 광장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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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선 법무법인 광장 고문은 서울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학 석사, 가천대학교 회계세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23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국세청, 재무부 등에서 근무했으며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 기획재정부 세제실장, 제24대 관세청장,삼정kpmg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심산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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