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정철근의 시시각각] 정치 편향 논란 헌재가 살길은

0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중앙일보

정철근 칼럼니스트


“최근 일부 정치세력이 헌재에 퍼붓는 저주와 매도는 우리 헌정질서의 뿌리를 흔드는 위험천만한 정치행태다. 헌재의 결정과 권위를 부인하는 것은 이 나라를 또 통제 없는 독재정치체제로 되돌리겠다는 발상이다.”

원로 헌법학자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가 2004년 11월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2004년엔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노무현)에 대한 탄핵심판이 벌어졌다. 헌재는 64일 만에 기각결정을 내렸지만 여론은 두 갈래로 갈라져 심한 갈등을 빚었다. 1987년 개헌 때 헌법재판소 설립을 주장해 관철한 허 교수에게 헌재에 대한 정치권의 공격은 ‘저주와 매도’로 보였을 것이다.



헌재 옹호 허영 교수도 헌재 비판

졸속재판 김재규 사건 45년 뒤 재심

법적 하자 없어야 신뢰 회복할 것

허 교수는 헌재가 자유민주주의 헌법질서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고 믿었다. 그는 95년 검찰의 5·18 내란사건 불기소처분 당시 ‘5·18 불기소처분의 헌법이론적 문제점’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단죄하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 탄핵으로 파면된 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에 대해서도 “탄핵제도의 본질을 이해하고 헌법을 규범조화적으로 해석한다면 부정적인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반대 의견을 밝혔다.

누구보다 헌재를 옹호했던 허 교수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을 놓고 완전히 돌아섰다. 그는 “헌재가 졸속재판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센 가운데 대통령을 파면한다면 완전히 가루가 돼 없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고 거친 표현까지 쏟아냈다.

고 강신옥 변호사는 74년 민청학련 사건을 변호하면서 그 유명한 ‘사법살인’이란 표현을 썼다가 중앙정보부로 연행돼 모진 고초를 겪었다. 강 변호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괴롭히고 감시했던 ‘중정’의 수장을 변호하게 된다.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내란 목적 살인사건이다.

김재규 사건이 45년 지난 지금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재판장 지귀연)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구속취소 결정을 내리면서 김재규 재심사건을 거론했기 때문이다.

서울고법이 김재규 사건 재심 신청을 받아들인 것은 김재규 재판이 위법적이고 졸속으로 진행됐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김재규 1심 재판은 17일, 항소심은 단 7일 만에 끝났다. 대법원에서 김재규에 대한 사형선고가 내려진 5월 20일 강신옥 변호사는 전두환이 이끄는 보안사의 서빙고 대공분실로 끌려가 매타작을 받았다.

김재규 재심사건 변호인단은 “재심은 당시 재판이 내란죄를 덮어씌운 정치적 재판이었다는 사실과 절차적으로 얼마나 부당했는지를 규명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헌재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불리해진 쪽으로부터 욕을 먹을 것이다. 헌재가 어떤 결정을 할지는 헌재의 권한이지만 헌법과 법률을 지키는 것은 헌재의 의무다. 허영 교수가 헌재를 비판한 이유는 심리 과정에서 10여 개의 법률 위반을 했다는 점이다. 절차적 정당성이 결여된 헌재의 결정이 본질적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헌재는 행정부뿐 아니라 국회와 법원이 권력을 남용할 때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헌재 재판관들이 진보와 보수 성향으로 나뉠 수는 있지만, 정치적 편향성으로 갈라져선 안 되는 이유다. 헌재가 정치화하면 ‘갈등 조정기관’이 아닌 ‘갈등 조장기관’으로 전락해 대한민국을 분열로 이끌 것이다. 헌재는 지금 피로도가 극에 달한 상태다. 13건의 탄핵심판을 처리하는 것도 힘든데 다수당인 민주당은 탄핵이 계속 기각되는데도 심우정 검찰총장 등을 추가 탄핵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허영 교수는 다수당의 폭주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국회에서 절충과 타협보다 숫자로 밀어붙이려는 것은 다수결을 민주주의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타협과 절충을 위한 토론 과정을 생략한 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다수결은 다수의 독재에 불과하다.”

정철근 칼럼니스트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주요 뉴스

해당 언론사로 연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