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3 (일)

[지평선] 미치광이 전략 남발

0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13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과 회담하고 있다. 집무실 집기들이 황금 장식으로 도배돼 있다. 워싱턴=AP 뉴시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9년 10월 비밀리에 미군에 핵전쟁 경계령을 내렸다. 닉슨이 핵단추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는 소문도 퍼뜨렸다. 소련을 압박해 북베트남과 평화회담에서 양보를 얻어내려는 카드였다. 진짜 핵전쟁을 하겠단 생각은 없었다. 2009년 기밀해제된 문건에 따르면 얼 윌러 당시 합참의장은 군 지휘관들에게 “소련을 위협하지 않으면서도, 알아차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자신을 예측불가능하고 비이성적인 인물로 인식시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미치광이 전략’이었다.

□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 퇴진한 닉슨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1982년부터 11년간 펜팔로 지냈다. 첫 편지는 30대 부동산 사업가였던 트럼프가 먼저 보냈고, 60대 닉슨은 “조언을 공짜로 제공하겠다”고 화답했다. 닉슨은 1987년 12월 “결심만 한다면 당선될 것”이라며 일찌감치 대선 출마를 권유했다. 편지 주제는 부동산으로 시작해 베트남 전쟁, 미디어 전략 등 정치·외교까지 넓혀졌다. 닉슨과 닮은꼴이라는 트럼프가 미치광이 전략을 펴는 건 우연이 아닐 수 있다.

□ 트럼프는 재집권 후 파나마운하 소유권을 주장하며, 비무장 국가 파나마를 무력 점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우리 영토”라며 병합하겠다고 위협했다. 캐나다엔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라고 권했다. 위력 행사 때문일까. 홍콩 기업 CK허치슨은 최근 운하 운영권을 미국 블랙록에 매각했다. 홍콩 언론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격노했다고 전하지만 진짜 속내는 알 수 없다.

□ 트럼프 재집권을 염두에 두고 4년간 대비 전략을 짠 시 주석과 집권 1기 전략을 답습하는 트럼프 중 누가 주도권을 쥘까. 중국이 운하 운영권을 포기한 건 트럼프가 승리감을 만끽하도록 하는 역전략일지도 모른다. 트럼프는 이미 자신의 ‘거래의 기술’에 도취된 듯하다. 미치광이 전략도 신용이 있을 때나 통한다. 남발하면 독이 된다. 닉슨의 미치광이 전략은 소련이 무대응으로 일관하면서 실패했다. 미국이 패전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평가가 갈수록 늘고 있다.

이동현 논설위원 nani@hankookilbo.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 주요 뉴스

해당 언론사로 연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