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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영의 아는 그림] 그늘도 빛나는 오지호의 ‘남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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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권근영 문화부 기자


대추나무엔 잎이 하나도 없다. 오후의 따사로운 햇볕에 백구는 잠이 들었다. 빨간 원피스 입은 아이는 외투 없이 문밖을 나서려는 참이다. 오른쪽 아래 ‘一九三九年 之湖’라고 서명했다. 추위가 미적거리는 요맘때 생각나는 오지호(1905~82)의 ‘남향집’(사진)이다.

그림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한가운데의 그림자. 노란 초가집과 황토벽에 나무가 청보랏빛 긴 그림자를 늘어뜨릴 때 오지호는 붓을 들었다. 첫 전시 때 붙인 제목이 ‘사양(斜陽)’, 해 질 녘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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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미술학교 유학 시절 오지호는 외광파(外光派) 양식을 익혔다. 일본의 흐리고 습한 대기와 만난 절충형 인상주의다. 1935년 개성 송도고보 미술 교사로 부임한 뒤 야외로 나가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사생했다. 그림 속 초가는 이때 살던 집이다.

화가 사후 아내는 ‘남향집’을 비롯한 34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남향집’은 2013년 등록문화재가 됐다. 인상주의를 토착화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음 달 말부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상설 전시된다. 마침 오지호 탄생 120주년이다.

그림자마저 환하다 해서 그의 삶이 환희로 가득했던 건 아니다. 따뜻한 봄날 풍광 같아 뵈지만, ‘남향집’은 겨울 초입에 그렸다. 하지만 메마른 초겨울 그늘에도 빛이 있고 색이 있다. 작가는 봄을 기다리며 그 빛을 좇았다. 그림을 보는 오늘 우리도 비슷한 심정일 게다. 참 모질고 긴 겨울이었다. 이제 그만, 봄이 왔으면 좋겠다.

권근영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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