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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으로 돌아가겠다” 임윤찬의 ‘구도자’적 태도를 질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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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임윤찬. 반 클라이번 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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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반 클라이번 콩쿠르를 앞두고 불과 몇 달 전이었다. MBC TV예술무대에서 임윤찬이 치는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을 본 것은. 심장 밑바닥까지 울리는 타건, 불꽃처럼 넘실대는 에너지에 매료된 나는 즉시 임윤찬의 에이전시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꽤나 집요하고 끈질기게 매달렸고 오랜 공을 들였으나, 에이전시는 정중히 거절했다. 극비이지만 반 클라이번 콩쿠르 출전을 앞두고 있고, 그 전까지는 본인이 연습에만 매진하고 싶어한다는 사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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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예술무대에 나왔던 당시 임윤찬은 고작 17살이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 출전할 수 있는 나이는 18살부터였고, 팬데믹으로 콩쿠르가 1년 미뤄진 덕에 이듬해 출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임윤찬은 완벽한 초절기교 연습곡과 폭풍처럼 몰아치는 라흐마니노프 3번 피아노 협주곡을 선보였고 연주가 끝나자 지휘자 마린 올솝은 눈물을 훔쳤다. 그는 이 콩쿠르의 역대 최연소 수상자가 된다.



우승 이후 비범한 인터뷰도 화제가 됐다. “산에 올라가 피아노만 치며 살고 싶다”는 바로 그 말 말이다. 미성년에서 성년이 되는 동안 임윤찬은 종종 드레스 슈즈 대신 스니커즈를 신고 무대에 올랐으며, 음악 외 매체와의 접촉은 최소화했다.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인, 도무지 나이답지 않은 예술가. 세간의 평가는 그러했다. 그러다 종종 인터뷰에 응할 때면 그는 긴 장발로 두 눈을 가린 채 내성적인 태도로 웅얼대듯 말했으나, 음악에 대한 사랑만은 선명하게 드러내곤 했다. 다른 무엇은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듯.



임윤찬의 첫 스튜디오 데뷔 음반은 쇼팽 에튀드 앨범이었다. 리스트와 라흐마니노프를 신들린 듯 화려하게 치던 그가 소품에 가까운 연습곡(완성도와 예술성과는 별개로)을 데뷔 앨범으로 내다니, 의외의 행보라고 여겼다. 임윤찬은 데뷔 음반으로 쇼팽 에튀드를 택한 것에 대해 “어릴 때부터 연습해온 작품으로 10년 동안 속에 있었던 용암을 이제야 밖으로 토해내는 느낌이다. 에튀드를 연습하지 않았던 시기에도 에튀드의 노래들은 마음 속에서 계속해서 깊어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과연, 들어보니 그러했다. 나는 이런 쇼팽 에튀드를 처음 들었다. 명료하고도 투명한 타건과 과감한 루바토, 시의 행간을 읽는 듯한 서정적인 프레이징, 숨결을 불어넣는 듯한 페달링. 기존 쇼팽 스페셜리스트들의 미덕을 갖추되 자기만의 해석과 개성을 숨기지 않는, 오직 임윤찬만의 쇼팽 에튀드였다. 특히 3번 ‘이별의 곡’은 시가 음악이 된다면 바로 이러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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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임윤찬. 유니버설뮤직 제공




지난 겨울 나는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일생에서 가장 힘든 계절, 나는 깊은 구덩이에 파묻혀 얕은 숨을 간신히 내쉬며 임윤찬의 쇼팽 에튀드 Op.10 3번, ‘이별의 곡’을 수액처럼 달고 살았다. 임윤찬의 ‘이별의 곡’은 나를 다독이고 먹이고 재웠다. 숨결처럼, 체온처럼, 그 모든 실패도 회한도 지나고 나면 다 괜찮을 것이라고, 눈을 감기고 연고를 덧발라주는 단정한 손길처럼. 그 곡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몸을 가누고 있지도 못할 것이다. 한편 나는 이 앨범으로 내가 임윤찬에 대해 다소 간에 오해가 있었다는 걸 확인했다. 그는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처럼 무겁고 뜨겁게 발산할 뿐 아니라, 프랑스 피아니스트들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투명해질 줄도 알았다. 그를 록스타처럼 생각했던 이미지를 수정하게 된 계기였다.



그밖에도 임윤찬은 베토벤의 ‘황제’를,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보여주며 계속해서 나의 인식을 바꿨고 기대를 갱신했다. 그는 때론 에밀 길렐스 같았고 때론 호로비츠 같았으며 때론 글렌 굴드 같았지만, 동시에 그 누구도 아니었다. 임윤찬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성장해가고 있는지, 오직 그 자신의 음악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영국의 그라모폰 어워즈 피아노 앨범상과 젊은 음악가상, 프랑스의 디아파종 황금상을 수상한 것은 그에 대한 부연일 뿐.



그런 임윤찬의 태도는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활동했던 음악가들 같다. 리스트 같은 스타성을 가졌으면서도 쇼팽처럼 내성적인 태도를 지닌. 동시대 한국을 사는 21세 청년이라곤 도무지 여겨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임윤찬이 그로선 무척 신기하게도, 하지만 그 나이대로선 당연하게도 SNS 계정을 만들어 이런 저런 근황을 업로드해 한동안 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러다 며칠 전 그는 바흐의 초상과 함께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별안간 SNS를 비활성화했다. 적막만이 흘렀다. 이제 그를 다시 만날 방법은 다시 음악뿐이다.





피아니스트 임윤찬. 빈체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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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위의 숏폼과 짧게 치고 빠지는 도파민과 ‘뇌썩음’(Brain rot)의 시대, 임윤찬은 음악가로서의 압도적인 재능 외에도 내가 가장 갖고 싶은 걸 갖고 있었다. 투명할 정도로 빛나는 순수한 몰입. 긴 호흡의 텍스트를 독대하는 집중력.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예술가의 태도. 현대 사회의 간편한 도파민 충족 수단들과 수많은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피아노와 나만이 있으면 된다고 말하는 이 구도자를 어떻게 질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빠르고 방대하며 쓸데없는 정보와 사소한 인정욕구와 금세 휘발될 연결감을 카페인처럼 충전하며 순간을 채운다. 새로 뜬 쇼츠 및 릴스를, 커뮤니티의 인기글을, SNS의 ‘좋아요’ 수를, 메신저의 메시지 알림을 끊임없이 새로고침한다. 잠시라도 공급을 멈추면 말초신경은 MSG를 더 내놓으라며 아우성친다. 스마트폰을 끈 채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도,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것도, 공연장에 앉아 음악을 듣는 것도 힘겹다. 그 무의미한 소음과 파편들이 모여 한 인생이 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끔찍한 일생인가.



그동안 임윤찬은 산 속이든, 연습실이든, 어디든 피아노와 자신만의 싸움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패스트푸드 같은 도파민 대신 오래 공들인 기나긴 기도를, 흐트러진 영혼을 조율하는 시간을 통째로 선사하는 것이다.



혼자됨을 마주하는 것. 오직 나와 내가 몰두해야 할 것만을 두는 능력. 그것을 위해 동시대의 갖가지 편의와 쾌락을 외면할 수 있는 능력. 한없는 고독 속 자신을 단련시키는 능력. 그 구도자적인 면모를 나는 깊이 질투한다. 사실 내가 질투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재능에 있어선, 그러니까 베토벤, 바흐마저 자신만의 해석을 선보이는 21살 임윤찬의 성장을 볼 수 있는 동시대의 청자라는 것은 그저 행운일 뿐이다.



간밤엔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치는 꿈을 꿨다. 악보를 보며 더듬더듬 건반을 짚는 현실의 나와는 달리 꿈 속 손가락은 매끄럽고도 자유로워 내 머리 속 음악과, 내 귀에 들리는 음악은 하나가 됐다. 그 쾌감은 머리 꼭대기를 치고 발끝까지 차올랐다. 둥실 떠오르는 혼연일체의 충만함, 무중력의 시공간을 유영하는 듯한 전능감.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어? 어릴 땐 주저 없이 록스타라 답했다. 그 질문을 지금 다시 받는다면, 이제는 피아니스트라고 답하고 싶다.







‘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은?



이예지 <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에게는 세상 모든 사람을 질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부러운 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 그의 오랜 습관이지요. 이예지 디렉터가 <GQ>, <아레나>, <씨네21> 등 4개 매체를 거치며 지금껏 만난 사람들의 면면 중에 가장 열렬히 질투했던 구석을 파고든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질투는 나의 힘'은 격주 수요일 낮 12시에 만날 수 있습니다.







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


이예지 <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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