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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뉴] 잿더미가 된 고운사, 염라대왕 뵐 면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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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행' 면해주는 용서와 구원의 국내 대표 성지

천하명당, 세상사 잊으려던 최치원·공민왕의 혼 깃들어

'구름 속 나비' 국가보물 가운루마저 사라져

[올드&뉴] 잿더미가 된 고운사, 염라대왕 뵐 면목이 없다

연합뉴스

화마에 깨져버린 고운사의 범종
(의성=연합뉴스) 26일 경북 의성군 단촌면 고운사 범종이 불에 타 깨져 있다.이번 화재로 국가 지정 문화유산 보물로 지정된 고운사 가운루와 연수전 등이 소실됐다.


(서울=연합뉴스) 김재현 선임기자 = 경북 의성의 고운사(孤雲寺)는 이승과 지옥의 중생을 구제해준다는 지장(地藏)보살의 성지로 유명하다. 사람이 죽어 명부(冥府), 즉 저승에 가면 재판소장인 염라대왕이 "자네 고운사엔 다녀왔는가?"라고 묻는다는 구전이 내려올 정도다. 그래서 고운사엔 지장보살과 염라대왕 앞에 나아가 용서와 죽은 이의 명복(冥福)을 비는 중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의성 등운산 자락의 고운사 터는 연꽃이 반쯤 핀 부용반개형상(芙蓉半開形象)이라 하여 천하의 명당으로도 유명하다. 신라 신문왕 원년(681년)에 해동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 대사가 창건할 땐 높은 구름 속 명당이라 해 고운(高雲)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다 200여년 뒤 신라 말 대문호 최치원이 이곳에 들러 계곡 위에 가허루(駕虛樓)와 그 옆으로 우화(羽化)루를 짓고는 자신의 호(孤雲)를 따 지금의 사찰 이름으로 바꿨다. 최치원은 음란에 뼈져 살던 진성여왕을 나무라며 개혁안을 올렸다가 진골의 반대로 무산되자 정치를 등지고 고운사에서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가허루는 이후 고려 말 공민왕에 의해 구름을 탄다는 의미의 가운(駕雲)루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세상을 뜨자 실의에 빠져 산천을 떠돌다 고운사에서 지금의 현판을 남겼다. 번데기가 껍질을 벗고 날갯짓하는 나비(우화)가 되어 구름을 타고(가운) 하늘의 노국공주에 닿으려 했던 공민왕의 애틋한 심정이 담겨있다.

연합뉴스

가운루 소실 전 마지막 모습
(의성=연합뉴스) 불에 타 사라지기 전 고운사 가운루 마지막 모습. 2025.3.26


고운사가 의성 산불로 소실됐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최치원과 공민왕의 혼이 담긴 국가보물 가운루마저 화마에 휩싸여 전소됐다는 소식이다. 천년의 모진 풍파를 견뎌낸 사찰이 우주를 비행하는 세상에서 산불로 사라졌다니 참담하고 황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생들이 계엄과 탄핵으로 갈려 아귀다툼을 벌이는 사이 해동제일의 지장보살도 한낱 잿더미가 됐으니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자네 고운사엔 다녀왔는가?"라고 물을 염라대왕을 볼 면목이 없다.

jah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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