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희 언론인]
김인(1918.12.15~1945.3.29)은 백범 김구의 큰아들이다. 김구는 딸 셋을 두었지만 모두 어린 나이에 세상을 버려 마흔둘에야 이 아들을 다시 얻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광복을 5개월 남겨 놓은 시점에 스물일곱의 나이로 중국 충칭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게 벌써 80년 전 일이다. 광복을 생각하면 늘 김인이 생각난다.
그의 일생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다. 20대에 이국땅에서, 그것도 복잡다단한 독립운동 과정에서 요절한 김인에 대해선 애당초 전기적 기록이 정리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결혼 일자와 장소도 분명하지 않고, 신접살림을 차린 장소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독립운동사 연구자들 가운데 김인의 삶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의 80주기를 앞두고 <백범일지> 등에 편편이 남은 그의 흔적을 모아본다. 그렇게 조각들을 이어 붙일수록 그 사이 사이의 빈칸들이 더 도드라져 보일 수도 있지만 잃어버린 한 시대를 찾아가는 심정으로 정리해 본다. 그 빈칸들에서 '순정한 청년 혁명가'의 얼굴이 어렴풋이라도 떠오르기를 기대한다.
두 장의 사진
아내 최준례는 1920년, 두 돌이 채 안 된 김인을 데리고 남편 찾아 상하이로 갔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가족과 함께 넘어서야 한다는 건 동서고금의 진리다. 김구가 신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무국장이던 때였다. 이때 세 식구가 재회를 기념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망명지일망정 자못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김인의 첫 사진이었다. 다시 두 해 뒤, 작은아들 김신이 태어났다. 그 무렵 할머니 곽낙원까지 상하이로 와서 이제 다섯 식구였다. 김구는 이 시절을 두고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었다"고 표현했다.
망명객에게 재미와 행복은 호사인가? 다시 두 해가 채 안 돼 아내 최준례가 숨졌다. 작은아들을 낳은 뒤 계단에서 굴러 고생하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때 장례를 치르고 그 묘비 주위에 남은 식구들이 둘러서서 모두 다섯 식구인 양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이것이 김인의 두 번째 사진이었다.
▲상하이 초기 김구 일가의 빛과 그림자. 왼쪽은 김구-최준례 부부와 큰아들 김인이 합류해 단란하던 1920년 초, 오른쪽은 작은아들 김신이 태어나고 어머니 곽낙원까지 합류해 다섯 식구가 '재미있는 가정'으로 살다 '대한민국 6년(1924년) 1월 1일' 숨진 아내 최준례의 장례 직후. ⓒ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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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따라온 망명지에서 일곱 살에 어머니를 잃은 소년이 김인이었다. 그래도 그는 의젓했다. 큰 굴곡 속에 삶이 무겁긴 했으되 그의 어깨를 짓누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의연한 태도가 은연중 그에게도 배어 있었고, 할머니의 대범하면서도 자상한 사랑이 늘 그를 부추겨주었다. 그런 점에서 김인은 어려서 이미 부쩍 큰 아이였다.
그렇다고 삶이 어렵지 않은 건 아니었다. 우선 두 손자를 책임져야 했던 곽낙원이 상하이에서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판단했다. 젖먹이 김신은 늘 할머니의 빈 젖을 물고야 잠이 들었다. 그렇게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었고, 기본적인 생활 자체가 되지 않아 김신을 고아원에 맡겼다 찾기를 되풀이했다. 그 과정에서 죽더라도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대목이 있다. 그 무렵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이 정말 굶어 죽을 수도 있었을까? 사실이 그랬다. 삼일운동으로 한껏 끓어오른 독립운동의 열기는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큰 결실을 맺었지만, 한두 해 지나며 점차 깊어가는 노선투쟁과 점점 조여오는 일본의 압박 속에 임시정부 활동은 급격히 위축됐다. 상하이로 몰려들던 열혈지사들은 삼일운동 직후 2,000명을 넘기도 했으나 이내 썰물처럼 빠져나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 그만큼 세계 각지에서 부쳐오는 지원금도 급격히 감소했다. 본국에서 가져온 자금은 바닥나고, 더 이상 수입은 없고…. 굶어 죽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결국 김인의 첫 중국 시절은 1920년 8월부터 1927년 9월까지 만 7년으로 일단락됐다. 1919년 망명 때와 같이 중국에 남은 것은 김구 혼자였고, 세 식구는 다시 고국에 자리 잡았다. 과거와 다른 점이라면, 가족 밖에서는 그사이에 독립과 혁명의 열기가 형편없이 사그라들었다는 사실이었고, 가족 안으로는 아내 최준례가 한 생명을 더 내어놓고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었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왼쪽은 1931년 황해도 안악의 안신보통학교 제6회 졸업사진. 뒤에서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부모 없이 할머니 손에서 자라던 소년 시절의 김인이다. 오른쪽은 1934년 9년만에 네 가족이 다시 만난 것을 기념해 중국 난징에서 찍은 사진. 김인은 이미 청년티가 물씬 난다. ⓒ필자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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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쩍 큰 아이
김인은 국내에 있던 약 7년 동안 초·중등학교 과정을 거쳤다. 그는 고향 안악에서 1931년 봄 안신보통학교를 제6회로 졸업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뒤 전체 6년 과정 중 상급과정 3년만 이 학교에 재학했다. 그 뒤 바로 평양의 숭실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중등학교는 6년 과정이었기 때문에 1934년 봄 재망명 때 졸업하지는 못했다.
감수성이 예민할 소년기에 김인의 국내 생활이 어떤 파장을 낳았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안신보통학교 졸업사진을 보면 그는 철없는 아이 수준은 훌쩍 넘어선 느낌이다. 그러던 것이 다시 3년 뒤 재상봉을 기념해 난징에서 네 식구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김인은 소년티를 완전히 지웠다. 몸도 마음도 부쩍 큰 가운데 세상을 보는 나름의 눈도 갖추었다.
그 사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전례 없는 굴곡을 경험했다. 대표적인 것이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였다. 김구가 한인애국단을 바탕으로 기획·감독해서 만들어낸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이를 통해 임시정부와 한국인 독립운동을 보는 중국인들의 시각이 많이 바뀌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김인이 중국으로 나온 것이었다. 이제는 할머니를 따라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머니를 모시고 동생도 데리고 나왔다. 그는 오자마자 바로 그 무렵 개설된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했다. 이 군관학교에 한국인 특별코스가 설치된 일 자체가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정부의 달라진 대접의 일환이었다. 이 학교 입교를 계기로 김인은 자연스럽게 '전사'의 길로 들어섰다. 삶의 새로운 단계였다.
혁명의 길에서
이 시기 김인의 생각과 활동상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는 희귀한 자료가 하나 있다. 재망명으로부터 5년여 뒤인 1939년 '스물두 살 청년 김인'이 육필로 적은 메모다.
누이!
우리는 반역자!
현실과 타협을 거절하는 무리
외다.
우리는 혁명자!
정의를 우리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외다.
그리고
우리는 선구자!
선구자인 까닭에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압니다.
1939. 10. 김인
효숙 동무에게
▲청년의 기상. 세 살 위의 누이 김효숙의 수첩에 김인이 적어준 메모. 80여 년 전 김인의 기상이 아주 또렷하다.ⓒ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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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메모를 통해 그 5년여 사이에 대한독립의 전사이자 식민지 해방의 혁명가로 성큼 나아간 한 청년을 만날 수 있다. 단정한 육필에서 우러나는 육성이 서늘하다 못해 우리 골수로 파고드는 것 같다. 주어진 상황이 복잡할수록 오히려 더욱 순정한 혁명가가 길러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아름다운 청년인가, 위험한 청년인가?
이 1934~39년 무렵 김인의 활동 궤적을 시간순으로 정리해 보면 대개 이렇다. 이는 다소 복잡하고 매우 위험했던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었다.
○ 첫째, 김인은 1년 과정의 낙양군관학교(1934년 2월 92명 입교, 1935년 4월 62명 졸업) 교육 과정을 모두 마치지 못하고, 그해 7월 철수해 난징으로 돌아왔다. 이 학교 재학시절 그의 이름은 '김동산(金東山)'이었다. 철수의 이유는 그 무렵 임정 안팎의 갈등을 고스란히 반영한 한인 학생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한인애국단을 중심으로 한 김구 계열 학생들과 만주에서 넘어온 이청천 계열 학생들, 그리고 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파견된 김원봉 계열 학생들 간에 주도권 다툼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김구 계열 가운데 김인 등 25명이 퇴교하고 말았다.
○ 둘째, 김인은 낙양군관학교 철수 직후인 1934년 8월 철수생들 가운데 노태준, 안춘생, 고시복, 최덕신, 김동수 등과 함께 난징의 중앙군관학교에 제10기생으로 입학해 중단됐던 군관학교 학업을 이어갔다. 여기서 김인은 '김동일(金東一)'로 불렸다.
○ 셋째, 김인은 중앙군관학교 재학시절을 포함해 2년 동안 표면에 나서지 않고 난징, 광둥 등지에서 청년조직사업의 실무에 힘을 보탰다. 그 무렵 김구는 임시정부 고수파를 중심으로 한국국민당의 창당 작업을 진행 중이었고, 그 실무역량으로 청년조직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알려진 내용은 1934년 12월 난징에서 중앙군관학교 제10기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특무대 독립군', 1936년 7월 역시 난징에서 중앙군관학교 졸업생 및 별도로 모집한 청년들을 한데 모아 조직한 '한국국민당 청년단', 1936년 10월 광둥에서 그곳 청년들을 규합해 조직한 '한국청년전위단' 등이었다. 이 조직들은 당시 김구의 측근이던 안공근(1889~1939, 안중근 의사의 둘째 동생)의 지도 아래 있었으며, 실무자는 그의 큰아들 안우생(1907~1991)과 김인이었다.
○ 넷째, 김인은 그 뒤 1936~38년 기간에 일본군 점령 지역이던 상하이 등지로 보내져 지하공작에 종사했다. 그 공작의 실상을 알기는 어렵지만, 대개 임시정부 또는 한국국민당 지시에 따라 상하이에 한국국민당 지부 및 청년조직을 재건하고, 일제 주요기관의 폭파 및 요인 암살 등의 계획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일들이었다. 상하이 지하공작의 동지들은 김동수, 이하유, 이재현 등 주로 아나키스트 계열이었다. 이 무렵 '한국국민당 청년단 상해지부'의 기관지로 <전고(戰鼓)>가 창간되어 발행됐다. 김인도 관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 시기에 김구는 안정근‧안공근 형제에게 당시 상하이의 일본군 치하에 있던 그들의 형수(안중근 의사의 부인 김아려 여사)와 가족들을 구출하려 했으나 이 공작은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그 결과 안중근 의사의 자식들은 결국 일본 식민당국의 공작에 굴복해 아버지의 행적에 먹칠을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 다섯째,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독립운동 단체들은 독립을 쟁취할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에 분산적이던 정치‧군사 조직의 통합을 서둘러 우파는 그해 8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를, 좌파는 11월 '조선민족전선연맹(민족전선)'을 각각 구성해 냈다. 좌우 통합까지는 아니나 일정한 통합역량을 조직하는 데까지는 성공한 셈이었다. 그중 임시정부와 한국광복진선이 광저우를 거쳐 1939년 2월 류저우에 도착해 구성한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김인도 참여했다. 임시정부가 공식 무력조직의 전단계로 구성한 것이었고, 김인으로서는 1934년 중국 재망명 뒤 공개조직에 처음 이름을 올린 것이었다.
○ 여섯째, 김인은 1939년 11월 충칭에서 조직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참여했다. 이는 류저우에서 조직된 청년공작대를 기반으로 했지만, 낙양 또는 중앙군관학교 출신 청년들이 다수 참여했다는 점에서 한국 독립운동 진영이 그동안 길러낸 청년리더십이 결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36년경 상하이에서 함께 지하공작을 벌이던 아나키스트 계열 청년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당연히 김인도 그 그룹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전지공작대는 실제 일본군과 대치하던 시안으로 파견되었고, 나중에 광복군 제5지대로 흡수됐다.
▲순정한 청년들. 충칭에서 결성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1939년 11월 17일 시안으로 떠나기에 앞서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전지(戰地)'라는 표현이 주는 결연함이 청년들의 얼굴에 묻어난다.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김구 주석이고, 오른쪽 끝이 김인이다. ⓒ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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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으로 가려는 결단
청년 김인이 1930년대 중반 이후 중국에서 걸었던 길은 이렇게 대부분 지하공작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그 실상을 다 알기 어렵다. 그러나 그 무렵의 활동상을 짐작케 하는 귀한 증언이 하나 남아 있다. 위의 네 번째 단계인 상하이 시절의 무정부주의자 동지 이재현(1917~1997)이 이하유(1909~1950)의 26주기에 정리한 추도문이 그것이다. 그중에 김인을 포함해 상하이 지하공작 동지들이 상하이를 탈출해 충칭 또는 시안으로 진출하는 복잡다단한 과정(위의 네 번째 단계에서 다섯 번째‧여섯 번째 단계로 이어지는 과정)이 실감나게 정리되어 있다.
중일전쟁시 1937년 중화민국 수도 난징이 함락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와 그 가족들은 호남성 창사로 옮겼다. 필자는 도중에 한커우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밀명을 받고 홍콩으로 향하게 되었으니 임무는 당시 상하이에서 운동하고 있던 지하운동 조직과의 연락관계였다. 중국 정부에서 파견된 2명의 중국인과 같이 홍콩에 도착하니 안우생[1907~1991] 형이 이미 그곳에 있어 우리 일행을 맞아 주었다.
다음해(1938년) 중화민국 정부가 임시수도를 사천성 충칭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우리의 상하이 지하공작조도 철수 명령을 받고 홍콩으로 탈출(그 당시 상하이는 이미 일본군이 점령하였으므로), 만나고 보니 그들이 바로 이하유, 김인, 김강(김동수)였다. 이들은 광둥성 광저우로 가 창사에서 충칭으로 향하고 있는 임정의 대부대와 합세하게 되었다.
광저우에서 우리는 진통을 겪어야 했다. 쫓기고 있는 임시정부를 따라 깊숙한 후방인 충칭으로 가느냐, 그렇지 않으면 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일선으로 가느냐 하는 문제였다. 결과로 우리 젊은이들은 두 개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일부는 임시정부를 따라 충칭으로, 그리고 일부는 일선으로 향하기로 하였으니 그 주도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하유, 김인, 김강 등이었다. 그 당시 김약산(김원봉)이 지도하는 일부 청년들은 이미 한커우 일선에서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으니 우리에게 큰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그 당시 하유 형의 역할은 대단히 컸었던 것이다. 그는 백절불굴의 의지와 평민적인 생활태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한 실천력을 가진 청년으로 동지들 사이에 무형의 지도력과 감화력을 소유하였으며 그의 무언의 실천력과 호협심 및 깊은 의리에 모두 감복하였던 것이다. 올바른 일이라면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으며 동지들을 위한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았다. 김인과 단짝이 되어 모든 앞날의 계획을 세웠고 우리는 무조건 그들을 믿고 일치행동을 맹서하였었다.
그러나 우리의 일선행 꿈은 상상 외의 급격한 변화, 즉 광저우의 함락으로 깨지고 말았으니, 시뻘건 일장기가 광저우시 제일 높은 빌딩에 휘날리는 것을 바라보며, 그곳을 주야로 탈출, 100여 리를 걷다가 공습 대피 중인 최후 열차를 얻어 타고 탈출에 성공하였다. 우리 일행은 하는 수 없이 흥양을 거쳐 광서성 류저우로 향하여 그곳에 머물고 있던 임시정부와 다시 합류케 되었다.
다음해(1939년) 충칭에 도착한 일행은 초지를 불변, 이미 그곳에 먼저 와 있던 나월환, 박기성과 합세,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창설, 백범 김구 선생님의 적극적인 인솔하에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장제스 위원장의 재가를 얻어 우리의 심원을 풀게 되었다.
김인 등 상하이 시절의 동지들이 위기이자 기회인 중일전쟁 시기를 맞아 당초 결단했던 대로 결국은 전선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전쟁 시기에 모든 절차가 마음먹은 대로 순조롭게 되지는 않았지만 청년들의 신뢰와 동지애가 이들을 하나로 엮어주었다.
아마도 김인은 이들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지하공작을 하는 가운데 동지애는 물론이고 아나키스트의 본령인 '일체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그가 자기 손으로 적은 '반역자' '혁명자' '선구자'의 본뜻이었을 것이다.
큰 물결, 작은 물결
이것이 김인이라는 한 청년이 1930년대 중후반에 걸어온 길을 그 무렵 중국대륙 내 한국 독립운동의 흐름이라는 큰 틀 속에서 살펴본 것이다. 밖에서 볼 때에는 그저 한 흐름으로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작은 흐름들이 겹치고 섞이면서 때로는 조화롭게, 때로는 파열음을 내면서 흘러간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과정이었다. 위협은 일본이라는 적으로부터도 왔지만 안에서 서로를 향해 겨누는 칼날이 더 날카롭고 치명적인 경우도 많았다. 김인은 그런 최전선에서 성장했다.
그러던 중 김인이 1939년 10월 어느날 충칭 시내에서 아버지 김붕준과 함께 임시정부에서 일하던 김효숙(1915~2003)과 마주쳤고, 그래서 위의 메모가 남게 되었다. 그때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막 꾸려져 시안의 전선으로 출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동안 준비해 온 조직 역량과 각종 공작의 성과가 통합되어 이제 대일항전에서 결실을 맺는 상황이었다. 김효숙은 그를 만나던 장면을 미간행 회고록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나>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내가 우리 어머니 뵈러 토교에서 중경에 갔을 때 우연한 자리에서 상해 시절에 3,4세 때 보았던 인을 대면하게 되어 너무도 반갑고 감개무량하여 내가 방명록을 내어놓으며 한 자 적어주기를 청하였더니 쾌히 승낙하여 받아 놓은 글 한 구절은 내가 오늘날까지 보관하고 있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할머님[곽낙원 1939. 4.26 충칭서 별세]을 뵈온 듯 장손자 김인을 할머님 마음에 묻어드리고 싶다."
여기서도 다시 한번 큰 그림과 작은 그림이 겹친다. 김효숙은 자신도 1921년 일곱 살 어린이로 아버지 따라 상하이로 망명 와서 3,4년 연하 아기 시절의 김인을 본 뒤 근 20년이 지나 처음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그 사이에 김효숙은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과 지근거리에서 생활하기도 했지만 김인과는 마주칠 일이 없었다. 이렇게 같은 임정 계열이더라도 각자 살아가는 길은 꼭 같지 않았다. 그 길들은 서로 마주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했다. 동지끼리 전혀 만날 수 없었던 사례도 있다.
그런 만남과 헤어짐의 자세한 맥락을 이제 와서 정확하게 가리기는 어렵다. 예컨대, 임시정부가 1939년 2월 류저우에서 조직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김인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청년공작대가 그해 4월 류저우의 공원에서 찍은 기념사진에 김효숙은 있지만 김인은 없다. 그리고 김효숙은 그해 10월 충칭에서 김인을 20년 만에 처음 만났다고 말하고 있다. 김효숙의 말이 맞을 것이다. 아마도 김인은 청년공작대에 이름은 올렸지만 무슨 이유에선가 상하이 또는 광둥 지역에 더 머물다가 류저우를 건너뛰어 충칭으로 바로 건너왔을 수 있다.
그런 미세한 엇갈림들을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런 크고 작은 맥락들이 겹치는 과정에서 개인들의 만남과 헤어짐이 혁명전선에 뜨거운 피를 분출하는가 하면 만날 듯 스쳐가는 발걸음이 탄식을 낳기도 한다. 김인의 성장 과정과 그 결과 혁명남아로서 갖게 된 절절한 심정, 그리고 그를 지켜보는 김효숙의 반갑고 아련한 느낌 등이 그 무렵 성좌에 남은 흔적들이다.
충칭에서 안미생과 만나다
청년 김인이 미래의 반려자 안미생을 만난 것도 바로 이렇게 혁명가로 성장하고 역사의 한 구성요소로 자리 잡아가는 과정에서였다.
안미생(1919.7.13~2008.11.24)은 안중근 의사의 바로 아래 동생 안정근(1885~1949)의 장녀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안정근 선생 역시 중국과 러시아의 여러 지역을 거치며 독립운동 전선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해 온 역전의 용사였다. 다만 건강이 좋지 않아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서 장기간 가료 중이었다. 안미생은 웨이하이웨이를 떠나 상하이 칭화대학 등지에서 교육을 받았고, 안씨 집안 사람들 상당수가 그렇듯, 언어에 재능을 보여 외국어 구사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1939년, 안미생은 충칭의 영국대사관에서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연히 임시정부의 일도 거들었다. 한국어는 물론이고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안미생은 임시정부의 보물이었다. 그때 그는 아버지 안정근과 함께 충칭의 남안 지역에 살고 있었다.
김인이 충칭에 온 것은 임시정부 가족들의 본대가 류저우에 머물던 1939년 4월 무렵이었다. 그곳에서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 곽낙원 여사가 그만 인후염에 걸려 아들 김구가 먼저 가 있던 충칭으로 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김인‧김신 형제가 모시고 와서 임시정부 관계자 김홍서 씨가 마련해준 충칭 시내 남안의 손가화원에 머물렀다. 이제 가까스로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는 듯했으나 곽낙원 여사는 1939년 4월 26일 이곳에서 81세를 일기로 힘겨운 삶을 마감했다. 김인 형제에게는 어머니를 여읜 것과 같은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 무렵 김인은 일본군이 중국 대륙으로 침략해 들어오는 바람에 더 이상 상하이 등지의 비밀공작이 어려워지자 충칭의 중앙대학에 적을 두었다. 그러면서 임시정부의 선전부 소속으로 엄항섭 선전부장의 실무자 역할을 하는가 하면 한국국민당 계열의 잡지 <청년호성(靑年呼聲)>의 제작에도 참여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그가 청년전지공작대의 조직에 참여했던 점을 감안하면 정말 영일이 없는 생활이었다.
▲어머니 같았던 할머니. 1939년 4월 충칭시 남안의 손가화원에서 열린 곽낙원의 장례식. 김구와 스물한 살의 김인, 열일곱 살의 김신 모습이 보인다. ⓒ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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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공사 간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던 김인이 충칭에서 안미생과 마주쳤다. 청춘의 불꽃이 때와 장소를 가리던가. 구체적인 경위는 알 길이 없으나 두 사람은 임시정부 청사에서도 마주치고, 마침 두 사람 모두 거주하던 남안 지역에서도 만났을 것이다. 그러다 1940년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다. 지금에 와서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큰 별 김구 가문과 안중근 가문의 결합이라고 의미가 부여되기도 하지만 그 궁핍했던 시절에 결혼사진 한 장 남지 않은 것을 보면 하객들 모시고 결혼식이나 제대로 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다시 김효숙의 증언이다. 1943년 어느날의 일이었다.
"인(仁)은 리즈바(李子垻)의 중앙대학 재학 중 위해위(威海衛)에서 온 안중근 의사 조카딸 안미생과 만나 어린 딸을 낳았다. 안미생이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김붕준 씨[김효숙의 아버지]가 듣고 나를 불러 병원으로 가 보라고 하시어 내가 달려간 즉, 토실토실한 털이 보르르한 모토(毛兎, 신생아를 지칭)를 옆에 누이고 드러누웠는데 누구 하나 보살펴줄 형제도 없어…."
이것이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혈육 김효자의 출생 이야기다. 이 무렵 출산 직후의 안미생을 돌봐줄 사람이 제대로 없었던 것은 혼자서 서너 사람 역할을 하던 김인도 결국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인의 병환에는 눅눅하기 이를 데 없는 충칭의 공기도 단단히 한 몫 했다.
안타까운 죽음
김인의 병환과 별세에 대해서는 동생 김신의 증언(회고록 <조국의 하늘을 날다>)이 가장 확실하고 종합적인 설명이 될 수 있다.
"김인 형님은 충칭으로 돌아와 안중근 의사의 바로 아래 동생인 안정근 선생의 딸 안미생 여사와 결혼했다. 당시 안정근 선생 부부는 충칭 난안(南岸)에 살고 있었다. 형님과 형수는 딸 김효자(金孝子)를 낳았다. 형님이 병중에 낳은 딸이다. 형님은 충칭에서 폐병에 걸렸다.
당시 충칭은 민가와 공장에서 내뿜는 석탄 연기가 자욱하고, 저기압 분지라는 지형적 특성에 습기까지 많았다. 충칭에 있던 한국 사람들은 폐병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형님이 몸져 눕자 형수가 생활을 꾸려 나갔다. 형수는 영어에 능통해 충칭의 영국대사관 신문처(新聞處, 공보처)에 취직해서 일했다.
형님의 병세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어 볼 것은 페니실린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봉쇄로 물자 수송이 어려워 페니실린을 구하기 힘들었고, 가격도 매우 비쌌다. 형수는 아버지에게 페니실린을 구해 달라 부탁했지만, 아버지는 정색을 하며 말씀하셨다.
'여기 와 있는 동지들 중에 그 병을 앓다 죽은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내 아들만 살릴 수 있단 말이냐.'
형수는 아버지의 매정한 대답에 마음속으로 많이 원망했을 것이다. 형님은 안타깝게도 광복을 다섯 달 앞둔 1945년 3월 29일, 27세를 일기로 충칭에서 눈을 감았다. 피난 중에 겪은 할머니와 형님의 죽음은 내 영혼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한동안 대낮에도 캄캄한 밤중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슬퍼하고만 있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의 죽음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이 이야기는 실화 같지 않은 실화다. 특히 페니실린 대목은 '그 아들도 동지인데…' 또는 '페니실린 구해주면 과연 살았을까?' 등의 물음이 꼬리를 물며 머릿속을 맴돈다. 그러나 그 당사자들은 모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마음속에 원망을 담아 두었을 안미생도 1945년 시아버지 김구와 함께 귀국해 그의 비서 역할을 하던 중 1947년 홀연히 미국으로 떠나 그곳에서 'Susanna (Susie) Ahn'으로 살며 시댁과 절연하다시피 하다 그곳에 묻혔다. (<프레시안>의 2022년 기사 "안중근 조카·女독립운동가, 안미생 흔적 75년 만에 찾았다" 참조)
김인-안미생 부부의 하나뿐인 딸 김효자 역시 엄마 찾아 미국으로 간 뒤 그곳에서 'Sarah Chin Fisher'로 살고 있으나, 이제 노년인 그도 한국인 공동체와는 완전히 담을 쌓고 있다. 그의 결혼 전 성(姓) 'Chin'이 '김(金)' 씨의 중국식 발음이라는 점에서 출생의 아주 희미한 단서를 담고 있을 뿐이다. 그는 과연 페니실린의 비밀을 알기는 할까?
▲모녀의 길. 왼쪽은 어머니 안미생이 미국에서 살다 묻힌 뉴욕 롱아일랜드의 묘소. 그는 이곳에서 '안(Ahn) 씨'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오른쪽은 김인-안미생의 딸 김효자(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얼굴 가린 이)가 창덕여고 3학년이던 1960년 4‧19 직후 국내에서 처음 공식 개최된 김구 선생 추모식에 삼촌 김신의 가족들과 함께 참석했다. ⓒ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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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역자‧혁명자‧선구자
▲마지막 안식처. 김인은 대전 현충원에 할머니 곽낙원과 함께 유택을 마련했다. 광복 80년에 누가 그를 기억하고 그의 꿈을 되새길 수 있을까?ⓒ필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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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김인은 이렇게 해서 충칭의 화상산 공동묘지에서 곽낙원 할머니 인근에 묻혔다가 중국의 국공내전이 거의 끝나가던 1948년 8월 아우 김신에 의해 할머니 곽낙원, 어머니 최준례의 유골과 함께 수습되어 국내로 들어왔다. 이들 3대의 유해는 정릉, 금곡 등지의 가족묘지를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이자 김구 선생 50주기인 1999년에 최준례는 서울 효창동 김구 선생 묘소에 합장됐고, 곽낙원과 김인은 대전 현충원의 독립유공자 제2묘역에 조손 간에 나란히 안식처를 잡았다.
김인의 길지 않은 생애에서 그의 중국 체류 시기는 두 차례로 나뉜다. 1920(2세)~27년(9세)의 약 7년간과 1934(16세)~45년(27세)의 약 11년간이다. 국내에서 산 기간보다 중국에서 산 기간이 더 길다. 그중에서 첫 번째 기간에는 어머니를 잃었고, 두 번째 기간에는 할머니를 잃었다. 회복 불가능한 상실의 경험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의 삶까지 그곳에 묻었다. 그는 끝내 자기 발로 중국을 떠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자신의 말대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불모의 현실과 타협을 거부하는 반역자‧혁명자‧선구자였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2025년, 광복 80주년을 맞았다. 순정한 청년 김인이 목숨 바쳐 싸워 온 '광복'은 과연 무엇이었으며, 그것은 오늘날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그리고 오늘날의 '반역'과 '혁명'은 과연 무엇인지 다시금 묻게 된다.
[김창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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