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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신규 원전 천지 1·2호기 후보지 영덕 석리 산불로 전소…“화재 다발지역에 원전 짓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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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오전 대규모 경북 산불의 피해를 입은 경북 영덕군 영덕읍 석리의 모습. 오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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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닷가 방파제 밑 공간에 엎드려 숨만 쉬고 있었지.”

지난 25일 산불 피해를 입은 경북 영덕군 영덕읍 석리의 이미상 이장(62)은 27일 기자와 만나 당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산에서 넘어오는 “불뭉치”의 화력이 너무 강해 바닷가 석리방파제로 대피했다. 방파제 아래에서도 열기가 느껴졌지만, 간간이 불어오는 바닷 바람 덕에 겨우 숨을 쉬며 버텼다고 했다.

윤석열 정부가 추진해온 신규 원전인 영덕 천지1·2호기 유력 후보지가 바로 이곳이다. 지난 2월 국회 상임위를 통과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는 10년 만의 신규 원전 건립 방안이 담겼는데, 석리는 주민동의율이 높아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꼽혔다.

대규모 산불 피해를 입은 경북 영덕군 영덕읍 석리의 길 위에는 길게 전깃줄이 늘어져 있다. 오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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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마을은 지난 25일 경북 의성에서 순식간에 안동, 청송을 타고 넘어온 산불로 60여 가구가 피해를 입었다.

27일 찾아간 석리 마을은 포탄이라도 떨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산불이 마을을 덮쳐 쑥대밭이 돼 있었다. 염소와 소, 닭의 울음 소리만 들렸다.

커다란 슬레이트 지붕들이 화염에 구겨져 길바닥에 나뒹굴었다. 시멘트 벽면은 군데군데 무너져 내렸다. 몇몇 집에서는 아직도 매캐한 연기가 새어나왔고, 한 집의 보일러실로 보이는 곳에서는 빨간 불꽃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튀고 있었다.

27일 경북 영덕군 영덕읍 석리에 불에 타 무너진 집의 잔해가 방치돼 있다. 백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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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민들은 “불이 지면을 타고 가는 게 아니라 하늘을 날았다”고 했다. 산마다 검게 타버린 나무들이 서있었다. 그 위로는 방화용 소방헬기가 방화수를 담는 가방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날았다. 마을의 큰 돌과 풀, 흙도 검게 그을려 있었다. “대나무가 빽빽했다”던 야트막한 언덕도 잿더미만 남았다.

석리는 과거에도 신규 원전부지로 추진된 적이 있었다. 문재인 정부 때 원전 의존도를 낮추는 정책이 추진되면서 취소됐다. 주민들은 “저 타버린 산까지 해서 이 근방 100만평 가량이 원자력부지로 선정된 공간이었다”고 했다.

이날 오전 마을의 전 어촌계장 이우용씨(62)는 축사 앞 개울에서 물통에 물을 채우고 있었다. 10마리 남짓 소들에게 줄 물을 뜨기 위해서였다. 지난 25일 산불 피해로 수도 공급마저 끊어지면서 당장 취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물뿐만 아니라 전기 공급, 휴대전화 통화도 되지 않았다. 마을의 전기선은 땅에 길게 늘어져 있었고, 휴대전화에는 “서비스제한구역” 표시가 마을 밖 3㎞를 벗어날 때까지 이어졌다.

27일 산불로 마을이 전소된 영덕군 영덕읍 석리 마을에서 어촌계장 이우용씨가 개울가에서 물을 뜨고 있다. 오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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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곳에 실제 원전이 들어섰다면 어떻게 됐을까. 전문가들은 산불 위험이 있는 지역에 원전 건설은 매우 위험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행여 주변 산을 다 밀어내서 직접적인 산불 피해 위험을 차단한다 하더라도, 원전으로 이어지는 주변 송전선로 등이 불에 타면 발전소 정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박종운 동국대 에너지전기공학과 교수는 “(산불이) 전원 시설을 타격해 발전소 정전을 유발하게 되면 원전의 냉각이 불가능할 수 있다”며 “이게 심해지면 후쿠시마처럼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양이원영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22년 3월) 울진·삼척 산불 때문에 (울진) 한울 원전으로 이어진 송전선로가 완전히 끊기기 직전까지 갔다”며 “전력 공급이 대규모로 끊어지면 전력망 안정성이 깨지면서 대규모 정전 사태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원전 건립을 여전히 원하는 주민도 있었다. 석리의 한 주민은 “어차피 타버린 김에 더 탈 것도 없으니 전부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오면 좋겠다”고 했다. 화재 피해를 복원하는 대신 원전을 짓고 아예 주민들을 이주시키자는 절망감이 담긴 얘기였다.

경북 | 오동욱 기자 5dong@kyunghyang.com, 경북 | 백민정 기자 mj10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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