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 ‘고요한 하루절’에서 주지 법인 스님과 함께 공부하고 있는 불자들. 사진 ‘고요한 하루절’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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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이 손을 잡고, 꽃과 꽃이 마주 보며 미소 짓고, 산골 물과 새들이 소리를 주고 받고, 푸른 산 위에 한가롭게 떠 있는 구름이 어우러지는 화순 마을, 그 마을에는 겸손한 자태로 우뚝 솟아 있는 용암산이 있고, 그 산자락에는 ‘고요한 하루절’이라는 이름을 가진 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날, 이곳에는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오순도순 차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고요한 하루절의 스님이 마을 곳곳의 벗님들과 함께 공부하는 날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을 닮고자 하는 이들이 한 달에 한 번 모여 배우는 이날, 절의 이름처럼 나무도, 꽃도, 사람들도 고요합니다.
고요하다면 아무 말을 하지 않느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새들은 노래하고, 산골 물은 또랑또랑 흐르며 소리를 냅니다. 벗님들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 움직임과 소리는 고요를 깨뜨리지 않습니다. 마치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지면 ‘퐁당!’ 하고 번지는 물결이 연못이 고요함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함께 마시는 연두빛 녹차의 향기는 마음 고운 벗님들과 참 잘 어울립니다. 이런 날, 이런 하루는 마음에 고요, 청정, 평온, 기쁨이 어리는 마치 열반의 경지와도 같은 순간이 아닐까요?
이날, 고요한 하루절에 모인 열두 명 중 유독 눈에 띄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누구냐고요? 바로 초등학교 3학년 유섭이와 중학교 1학년 도윤이입니다. 두 아이는 형제인데, 가끔 동생 유섭이가 어른들에게 자신들을 형제라고 소개하며 말합니다.
“우린 그렇게 의좋은 형제는 아니에요.”
그러나 그 말과는 달리, 두 사람 사이에는 은근하고도 깊은 정이 흐릅니다. 이날도 돌아가며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어김없이 같은 소개가 이어졌고, 이를 지켜보던 어른들은 환하게 웃습니다. 도윤이가 유섭이를 바라보는 눈에는 다정한 애정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차를 마시던 중, 갑자기 유섭이가 손을 번쩍 듭니다.
“마이 디어 스님, 아이 해브 어 퀘스천!”
느릿하고 조용했던 공간이 순간 놀람으로 가득 찼습니다. 자리에 있던 어른들은 크게 웃으며 유섭이와 스님을 바라봅니다. 스님은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말합니다.
“마이 베이비, 홧 두유 원트 투 노우?”
그러자 형 도윤이가 곧바로 통역합니다.
“야, 이 꼬맹이야, 뭐가 그리 알고 싶으냐?”
유섭이는 형을 노려보고 어른들은 또 한바탕 웃음을 떠뜨립니다. 모두 손뼉을 치며 맘껏 웃었지만, 신기하게도 고요한 분위기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전남 화순 ‘고요한 하루절’ 법당. 사진 ‘고요한 하루절’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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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섭이가 말합니다.
“스님, 저번에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형과 함께 해인사 템플스테이에 다녀왔잖아요.”
스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습니다.
“그래, 알고 있지. 유섭이와 엄마는 해인사 팔만대장경 목판 먹물로 찍어내고, 형은 백팔배를 했다고 들었어. 할머니께서 사진까지 보내주셨지. 손주 자랑을 한껏 하시더라.”
그리고는 유섭이를 바라보며 물으십니다.
“그래서, 무엇이 궁금하니?”
유섭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합니다.
“그 절 이름이 ‘해인사’잖아요. 그런데 그동안 다닌 절들을 보면 이름이 다 한자로 된 세 글자였어요. 해인사, 송광사, 증심사, 선덕사, 실상사…, 전부 그렇단 말이에요. 그런데 스님이 계신 절은 왜 ‘고요한 하루절’인가요? 여섯 글자고, 한자가 아니라 우리말이잖아요.”
유섭이의 질문에 어른들도 관심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왜 그동안 ‘불암사’ 대신 ‘고요한절’이라고 했는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어른들은 궁금한 게 있어도 쉽게 묻지 못하고 머뭇거리곤 합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때, 도윤이가 아는 체하며 끼어듭니다.
“유섭아, 네가 말한 해인사, 송광사, 그리고 통도사를 합쳐 ‘삼보사찰’이라고 해. 부처님, 가르침, 그리고 스님들을 상징하는 거야. 알겠니?”
그러자 유섭이가 단호하게 말합니다.
“형님, 발언권 얻고 말씀하세요. 지금은 제가 말하는 시간입니다. 민주주의 합시다.”
도윤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유섭이를 바라봅니다.
스님이 답합니다.
“처음 이 절의 이름은 ‘불암사’(佛巖寺)였단다. 부처님 ‘불’(佛), 집 ‘암’(巖)을 써서 지은 이름이지. 지금도 공식 문서에는 불암사로 기록되어 있어. 하지만 처음 이 절을 창건한 스님께서는 ‘부처님답게 살아가겠다’는 뜻을 담아 불암사라 이름 지었으면서도, 스님은 세상 사람들과 더 가까이 공감할 수 있는 이름이 무엇일까 고민했단다. 그리고 스님은 우리말인 한글을 무척 사랑한단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보다 친근하고 가슴에 와닿는 절 이름을 짓고 싶었어.”
스님은 잠시 숨을 고르고 이어 말합니다.
“또한, 스님은 품사 중에서 명사가 때로는 매우 강하고 고정적인 의미를 지날 수 있다고 생각한단다. 그래서 명사 앞에 형용사가 있으면 그 뜻이 더 풍부하고 따뜻하게 다가온다고 믿는단다. 예를 들어 ‘마음’이라는 단어 앞에 ‘너그러운’, ‘따뜻한’, ‘넓은’, ‘친절한’, ‘용서하는’ 같은 형용사가 붙으면, 그 마음이 더욱 빛나 보이는 것처럼 말이야.”
스님은 미소 지으며 덧붙입니다.
“예전에 스님이 우리말로 지은 절 이름들을 본 적이 있단다. 전주의 한 도심 포교당 이름이 ‘참 좋은 우리절’이고, 땅끝마을 한 비구니 스님께서는 ‘어린 왕자’라는 간판을 걸어두셨지. ‘나도 언젠가 절이 생기면 이렇게 멋진 이름을 짓고 싶다’고 말이야.”
불암사와 함께 절 이름을 우리말로 짓기 위해 스님은 며칠이고 생각을 곰곰이 거듭했습니다. 독경과 염불을 하면서도, 공양을 하면서도, 산길을 걷다가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 절 이름을 떠올리며 마치 참선하는 선방에서 선승들이 화두에만 집중하듯, 온 마음을 다해 절 이름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언어에 깊은 관심이 있고 예민한 스님은 이름이 곧 뜻을 담는 그릇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뜻을 드러내는 이름에 집중했던 것이지요.
선뜻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던 스님은, 머리가 너무 복잡해져 고민을 잠시 내려놓고 별이 초롱초롱 빛나는 밤에 절마당을 거닐었습니다. 거닐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초승달과 별들이 고요히 소곤소곤하는 듯하였습니다. 마치 이태백이 누각에 올라 밤하늘의 별들이 너무 고와서 별들이 잠을 깰까 봐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는 심정이 스님에게도 느껴졌습니다. 그런 하늘 아래, 나직이 흐르는 산골 물소리와 절마당에 굴러가는 낙엽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때 스님의 가슴은 순간 서늘한 기운으로 감전된 듯했습니다. ‘고 요 하 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이렇게 고요한 시간 속에 있구나.
즉시 스님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할 절 이름을 떠올렸습니다. ‘그래, 그래, 고요한 하루절이다. 고요한 하루절….’
전남 화순 ‘고요한 하루절’로 가는 산책길. 사진 ‘고요한 하루절’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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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그렇게 멋진 절 이름이 탄생한 거군요. 스님은 돈오하셨네요.”
함께 있던 현해 보살님이 말했습니다.
“돈오란 순간, 찰나에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깨침은 순간에 오지만, 그에 이르기까지 힘겹고 정성스러운 시간을 거쳐야 합니다.”
스님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때, 또 한 사람이 말을 보탰습니다. 그는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방안에 전등을 끄고 촛불을 켜놓고, 조용히 시를 낭독하며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리는 아저씨였습니다. 그의 별명은 낭만시인, 음유시인이었습니다. 그가 나직이 시를 낭독하며 ‘고요한절’의 탄생을 예찬합니다.
“당신에게 가장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 길을 돌아가야 하며, 가장 단순한 곡조에 이르기 위해 가장 복잡한 시련을 거쳐야만 합니다.”
“아, 타고르의 기탄잘리에 나오는 시네요.”
책을 많이 읽는 할머니가 시의 출처를 알려주었습니다.
“유섭아, ‘고요한 하루절’은 이렇게 여러 날 동안 생각하고 생각해서 세상에 나온 거란다. 마음은 마음을 담아 이름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란다.”
“아, 그렇군요. 듣고 보니 스님이 조금 멋져 보입니다.”
옆에서 유섭이가 할머니가 살짝 꼬집습니다.
“스님, 지금 차담 시간인데, 차가 있으면 얘기가 있어야 차담이 되지 않겠습니까? ‘고요하다’는 의미를 알려주실 수 있나요?”
오랫동안 경전 공부를 많이 한 할아버지가 요청합니다.
“그럼 멍석을 깔았으니 말을 풀어볼까요?”
이때, 어릴 때부터 어린이를 위한 불교책을 열심히 읽은 도윤이가 아는 체를 합니다.
“그야말로 야단법석이군요. 용암산 도량에 법문을 베푸니 산판법석인가?”
변성기에 접어든 목소리로 한 말씀 하시는 도윤이 추임새에 모두 웃습니다. 사심 없는 웃음소리가 봄날 아름다운 햇살에 실려 명징한 음표로 발랄하게 울려 퍼집니다.
“권도윤군, 금강경은 어떻게 야단법석의 문을 열고 있는지 아는가?”
스님이 묻습니다.
“몰라요, 절에서 독송하는 천수경은 알아도 금강경은 처음 듣는데요.”
“오! 박학다식한 우리 형님도 모르는 게 있군요. 나무 관세음 보살.”
아우 유섭이는 형이 늘 만만하고 편한 모양입니다.
“금강경을 비롯한 모든 경전은 제자의 질문과 부처님의 답변으로 시작하지. 문답으로 이루어진단다. 좋은 답이 나오려면 좋은 질문이 있어야 한다. 너희들의 학교 공부도 마찬가지야. 잘 물어야 좋은 해답이 나온단다. 법문을 청하는 것을 ‘청법’이라고 하는데, 좋은 질문을 하는 것이 진정한 청법이란다. 여튼, ‘왜 고요한 하루절인가?’라는 질문은 좋은 청법이겠고.”
스님은 다시 두 아이에게 질문합니다.
“우리에게 왜 고요한 시간이 필요할까?”
그 질문은 단지 두 아이에게 향한 것이 아님을 알기에 모두 조용히 생각에 잠깁니다.
고 요 하 다, 고 요 하 다…. 우리가 바쁘고 복잡하며 빠르고 힘든 몸짓으로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고요함은 멀어진 말이 되었습니다. 낯설고, 아득하고, 거의 잊혀진 말이 되었습니다. 고요함이 이렇게 멀어지니 머리와 가슴을 채우는 말들이 내 가슴에 들어왔습니다.
“빨리빨리, 더 빨리, 지금 우리에겐 멀티가 필요해. 저 목표를 향해 한눈 팔면 안 돼. ‘이상한 나라 앨리스’에서는 모든 사람이 항상 뛰고 있어. 왜냐면 모두가 뛰고 있으니까 뒤처지지 않으려면 더 빨리 뛰어야 해. 열심히 살아야 행복의 언덕에 이를 수 있고, 열심히 살려면 더 빨리, 더 빨리 뛰어야 해. 결코 옆도 뒤도 보지 말고 오로지 앞만 보고 뛰어.”
아, 빨리 뛰니 심심할 틈도, 생각할 틈도 없네. 사람은 심심한 시간에 상상하고, 가슴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데, 숨이 가쁘네요. 고요함이 빠져 나간 자리에 이런 것들이 시끄럽게 날뛰니, 늘 가슴이 허전하네. 이 역설이 무엇인지….
그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속마음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차담에 모인 이들은 스님의 논리정연한 답이 말로 나오지 않아도 ‘고요하다’는 의미를 가슴으로 깨달았습니다. 마치 머리에 망치를 맞은 듯, 가슴은 감전된 듯 떨렸습니다. 깨침은 지식과 이론으로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고요한 시간 속에서 가슴으로,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나무 고요한 보살 마하살!”
모두 가슴에 손을 모았습니다. 도윤이와 유섭이는 어른들의 표정과 고요한 몸짓을 말없이 지켜봅니다. 알 듯 말 듯, 알 듯 말 듯….
고요하고 맑은 하늘에 휘파람새가 날씬하게 휘파람을 불며 날아갑니다.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법인 스님(전남 화순 ‘고요한 하루절’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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