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들은 무너지고 쓰러져 아사 직전
절규 안 들리나, 민란은 그리 시작된다
25일 서울지하철 4호선 남태령역 인근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소속 트랙터가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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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봉준 투쟁단이 트랙터 20대와 1톤 트럭 50대를 동원해 상경 집회를 하겠다고 모였다. 전국에서 몰려온 농민들은 경찰에 가로막혀 남태령 고개를 넘지 못했지만, 정치적 퍼포먼스로 해석하기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있었다. 그들은 '윤석열 대통령 파면'을 외쳤지만, 실질적인 구호는 따로 있었다. "못살겠다 갈아엎자!"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도 그들은 같은 구호를 외쳤다. 9년 만에 듣게 된 저 구호가 익숙하다면 최근에 자기 주변을 자주 둘러본 사람임에 틀림없다. "못살겠다"는 전봉준 투쟁단의 독점적 구호가 아니다. 평범한 우리 이웃의 목소리다. 장기간 이어진 극단적 이념 갈등과 무질서 탓에 우리는 잊어버린 게 있다. 게임하듯 여야의 승패에 매몰되다 보니 놓친 것도 많다. 유튜브에서 잠시 눈을 떼고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정말 죽고 싶다고 절규하는 이들이 많이 보인다. 먼 사람 얘기가 아니고 내 가족과 내 친구와 내 지인들의 목소리다. 막다른 길에 몰리자 그들은 개인회생을 신청했고 야반도주까지 했다. 사채에 손을 내밀고 치솟는 물가에 끼니 걱정도 했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은 특히 벼랑 끝에 서 있다. 폐업률은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고, 대출잔액과 연체율은 자고 일어나면 신기록이다. 구조적 문제와 과잉 경쟁 탓으로 돌리기엔 못살겠다는 아우성이 너무 절박하다. 절망적인 통계 수치를 거론할 필요도 없다. 이웃들은 최대한 비용을 아끼고 잠도 최대한 줄였다. 투잡 스리잡을 뛰며 직원도 내보냈지만 주머니 사정은 나아질 조짐이 없다. 마른 수건을 너무 짜내서 더 이상 짜낼 것도 없다. 극단적 선택을 고민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이웃도 있다. 그런데도 정부와 정치권에서 제대로 된 도움을 받아본 기억은 없다고 한다. 각자도생 심정으로 감내하고 있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면 어떻게 할까.
그들은 분노에 차서 말한다. 힘들다고 외쳤지만 외면했다.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모른 척했다. 민란은 그렇게 시작된다. 민란의 시초인 고려시대 망이·망소이의 난도 그랬다. 지배층의 무관심과 무능, 경제적 불평등으로 한계 상황에 내몰린 이들은 세력을 모아 개경까지 진격하려고 했다. 마지막 민란으로 평가받는 동학농민운동 때도 그랬다. 농민군을 이끌었던 전봉준은 결의문에서 "조정과 관리들은 백성들을 편안히 할 대책은 생각 않고 녹봉만 받아먹고 있다"고 일갈했다. 그가 봉기하자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한성까지 가려고 했다.
이웃을 만나 보면 금세 안다. 하루하루가 힘들어 죽겠다는 절규가 안 들리나. 신음하는 국민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신호를 줘야 하고, 먹고살기 힘든 이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비가 오면 불은 꺼지지만 분노한 민심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민심의 불길이 조금씩 조금씩 서울로 향하고 있다. “못살겠다 갈아엎자!” 위정자들은 그들의 외침을 깊이 새겨 들어야 한다.
강철원 사회부장 str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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