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01 (화)

가족주의 판타지를 넘지 못한 ‘폭싹 속았수다’

0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여성의 삶 다루지만, 낭만화된 가족주의 한계 뚜렷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광례(염혜란)와 애순(아이유·문소리)과 금명(아이유)을 중심으로 인간의 일생을 봄·여름·가을·겨울에 빗대어 펼치며 그 일생을 가능하게 한 가족애를 그렸다. 아이유가 맡은 애순의 모습. 넷플릭스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요새 어딜 가도 ‘폭싹 속았수다’(넷플릭스) 이야기가 나온다. 그 이야기의 포인트는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을 말하고, 어떤 이는 엄마 생각이 나서 휴지 한 통을 다 썼다고 한다. 한국전쟁 등 대한민국 격변기를 경험한 ‘아버지 세대’를 그린 영화 ‘국제시장’의 여성 버전으로 보는 이도 있고, ‘응답하라’ 시리즈에 빗대기도 하며, 김원석 감독의 전작인 ‘나의 아저씨’를 떠올리는 이도 있다.



부모의 사랑이 주는 뻐근한 부채감

‘폭싹 속았수다’는 광례(염혜란)와 애순(아이유·문소리)과 금명(아이유)을 중심으로 인간의 일생을 봄·여름·가을·겨울에 빗대어 펼치며 그 일생을 가능하게 한 가족애를 그린 드라마다. 볼거리도 풍성하다. 그 시절을 직접 경험한 이들에게는 향수를, 경험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사극’을 보는 것 같은 오래된 새로움을 준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선 보편적 힘이 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지극한 헌신과 사랑, 그런 부모를 향한 자식의 애틋한 존경과 감사, 가족을 잃은 깊은 슬픔 등은 시대와 세대, 개인과 국가를 넘어선 보편적 정서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부모 이야기 같기도, 내 이야기 같기도 한 이 드라마에 검푸른 ‘바당’에 뛰어들 듯 속절없이 풍덩 빠져들게 된다.



저마다의 감상이 다르겠지만, 광례와 애순, 그리고 애순과 금명을 통해 부모의 ‘내리사랑’을 보여주는 중심 서사는 거친 파도에 바다가 헤집어지듯 내 안 깊숙한 곳에 묵혀둔 불편한 감정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내 엄마는 자신을 ‘200점짜리 엄마’라 말하곤 했다. 장녀를 ‘살림 밑천’으로 여기던 시절에 첫째는 딸, 둘째는 아들을 낳으면 금메달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의미에서다. 나는 그 200점짜리 엄마의 딸로 사는 게 가끔 벅찼다. 엄마의 사랑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무거워서 그랬다. 그 사랑은 나를 살게 했지만, 살면서 두고두고 갚아야 하는 부채이기도 했다. 내 인생이



부모의 희생 값이라 생각하면 나는 온전히 ‘나’로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부모 사랑의 깊이와 자식 마음에 얹힌 부채감은 비례하는 법이다. 결국 자식의 인생 일부는 그 부채를 갚기 위한 담보가 될 수밖에 없다. ‘폭싹 속았수다’ 속 부모와 자식의 관계, 특히 모녀 관계를 보며 내내 감추고 있던 뻐근한 부채감이 되살아났다.



span#333333;\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엄마의 사랑은 ‘딸’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엄마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광례는 애순이 살아보지 못한 인생이며, 금명은 애순이 이루지 못한 꿈이다. 엄마는 딸을 통해 자신의 사랑과 인생을 완성한다. 그런 엄마에게 딸은 ‘금메달’로 존재한다. 딸에게 이 금메달이라는 호명은 딜레마에 가깝다. 금메달은 누군가의 목에 걸렸을 때만 존재감을 가진다. 그래서일까? 드라마에서 금명은 애순과 관식(박보검·박해준)의 삶에 자랑스럽게 걸린 메달인 ‘딸’로서만 존재하고 기능한다.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서울대에 진학하여 부모의 집을 팔아 교환학생으로 일본까지 다녀온 금명은 자기 삶을 적극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인물이다.



하지만 금명은 부모의 사랑에 둘러싸여 주체적이며 사회적인 존재로 성장하지 않는다. 오직 누군가의 연인이거나 애순과 관식의 딸일 뿐이다. 파혼을 선언하며 금명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결혼 어떻게 해. 우리 엄마, 아빠 울어.” 또한 금명에게는 친구 등의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의 흔적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즉, 드라마에서 금명은 단 한 순간도 ‘개인’인 적이 없다. 그렇게 보일 뿐이지.



span#333333;\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가족 바깥’으로 확장되지 않는 이야기

span#333333;\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시를 사랑한 문학소녀, 애순은 어떤가. 여자애라는 이유로, 집이 가난한 탓에 ‘급장’이 아닌 ‘부급장’이 돼야 했던 사건 이후 ‘부’가 붙은 것을 싫어하며 육지에서 공부하고 싶은 야망을 품은 ‘요망진’ 여성 애순은 금명을 임신하게 되자 ‘기꺼이’ 꿈을 꺾고 제주에 묶인다. 그렇게 애순은 ‘광례 딸’에서 관식의 사랑을 한껏 받는 아내이자, 금(명)·은(명)·동(명) 메달을 가진 엄마로 산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 학력을 취득하고, 자기 할머니 춘옥(나문희)이 준 통장을 털어 산 배를 시어머니가 관식의 성취처럼 여기려 할 때 당차게 자신의 덕임을 뽐내고, 어촌 ‘부’계장에 만족하지 않고 계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는 등의 성취를 이루지만 그뿐이다.



드라마는 애순의 개인적 성취를 스치듯 보여주는 것에 그치고 내내 그 영민한 ‘촉’을 자식에게 향하게 한다. 이런 가족 중심 서사는 감동적이지만, 가족 중심이기만 하면 개인은 성장과 확장이 어렵다는 걸 애순과 금명을 통해 알 수 있다. 가족 간의 희생과 헌신, 사랑은 분명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성장을 가로막고 ‘가족 바깥’으로의 확장을 막는 가족주의로 이어질 때 문제는 시작된다. ‘폭싹 속았수다’는 후자가 더 부각된 면이 있다. 드라마는 낭만화된 가족주의 안에 개인을 예속시킨다. 성인이 돼서도 가족에서 독립하지 못한 이들은 누군가의 딸과 아들, 엄마와 아빠로서 ‘내리사랑’을 실천하며 가족(제도)을 유지한다.



제주를 배경으로 시작하여 굵직한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하지만, 사회적 맥락을 소거해버린 것도 이 드라마의 한계다. 즉 ‘가족 바깥’의 세계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1960년대 제주의 풍경을 아름답게 보여주지만, 제주 사회의 특성과 4·3 사건을 비롯한 사회적 맥락은 삭제하고 개인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식이다. 물론 제주에서 4·3 사건이 오랜 세월 침묵의 영역에 놓였기에 이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 것이 완전히 잘못됐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제작진의 의지만 있었다면 적어도 마을에서 언급을 꺼리는 분위기나 침묵을 통해 역사적 고통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암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4·3 사건을 소거한 탓에 동명(신새벽)의 죽음을 향한 애끊는 슬픔은 사회적 의미로 확장돼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그저 한 가족의 비극과 자식을 잃은 부모의 오랜 슬픔이라는 좁은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한다.



방대한 서사에도 납작하게 보이는 이유

span#333333;\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금명이 서울대에 입학한 1987년은 ‘6월 항쟁’이 있던 해이고, 금명이 일본에서 돌아와 복학한 1990년대 초반은 여러 대학교에서 분신하는 학생들이 속출한 ‘분신 정국’이 이어지던 때다. 그러나 금명의 시간은 그것과 무관하게 흐른다. 드라마는 인물들이 살아온 시간의 변화를 알려주는 용도로만 과거를 활용하되, 공적 역사와 사적 역사를 연결하진 않는다. 바로 이 점이 ‘폭싹 속았수다’가 1960년대부터 2025년에 이르기까지 인간과 가족의 일대기를 그린 방대한 서사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일생을 다소 납작하게 만들고 ‘가족애’만 반복 재현하는 원인이 된다. 현대사와 무관하게 흐른 애순과 금명의 개인사는 보편적인 여성 서사로서도, 사회적 의미로서도 확장에 실패한 것이다.



물론 드라마가 마냥 퇴행적이고 문제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애순과 금명, 해녀 ‘이모들’을 중심으로 가부장제 아래 고단하지만 꺾이지 않았던 여성들의 일생과 연대감을 보여주고자 노력한 면도 있다. 또한 한심한 가부장, 부상길(최대훈)과 자신과 자식의 인생을 동일시한 영범이 엄마 부용(강명주)을 통해서는 가부장제의 그늘을 서늘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드라마는 가장 중요한 인물인 애순과 금명이 아닌, 가부장인 관식에게 낡고도 부당한 관습을 깰 기회를 준다. 남성 가족 구성원과 여성 가족 구성원이 겸상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 관식은 완두콩을 좋아하는 딸 금명을 위해, 그리고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지 못하는 아내 애순을 위해 ‘반 바퀴’ 돌아앉기를 감행한다. 그 순간의 의미를 금명은 이렇게 회고한다. “아빠가 돌아앉던 찰나를 엄마는 평생 잊지 못했다. 밥사발을 들고 돌아앉은 도동리 최초의 남편일 거라고 엄마는 백번쯤 말했다. 아빠는 아빠의 전쟁을 해냈다. 절대로 엄마 혼자 전장에 두지 않았다. 그 시절 아빠의 반 바퀴는 혁명이었다는 걸 나는 숭늉을 푸며 깨달았다.” 드라마는 그 ‘반 바퀴 혁명’을 왜 관식의 몫으로 두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왜 금명에게로 이어지지 못했을까?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가부장제 속 여성의 삶과 사회적 맥락을 깊이 있게 그려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음에도 가족주의라는 익숙하고도 낡은 관습을 뛰어넘지 못했다. 넷플릭스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반 바퀴 혁명’은 왜 관식의 몫이 됐을까

결국 ‘폭싹 속았수다’는 가부장제 속 여성의 삶과 사회적 맥락을 깊이 있게 그려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음에도 익숙한 관습과 가족주의라는 편안한 지붕 아래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제주라는 구체적인 공간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과 시대적 변화 속의 개인적 성장을 좀더 치열하게 연결했다면, 드라마는 그저 향수나 가족주의에 주저앉지 않고 더 넓은 (여성) 서사의 지평을 열 수 있었을 것이다. 가부장들의 역사로서만 기억된 ‘국제시장’과 한껏 미화된 화면 속에서 ‘남편 찾기’에 골몰한 ‘응답하라’ 시리즈와 기성세대를 향한 연민을 한없이 반복했던 ‘나의 아저씨’를 거쳐 도달한 곳이 겨우 가족주의라니. 그 ‘반 바퀴 혁명’의 길이 참으로 멀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한겨레21 뉴스레터 <썸싱21> 구독하기
<한겨레21>과 동행할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네이버 채널 구독하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한겨레21 주요 뉴스

해당 언론사로 연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