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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목)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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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살에 초등학교를 중퇴한 소년은 중국집에서 배달을 하고 그릇을 닦으며 청소년이 됐다. 청소년은 공장에서 가방을 만들며 청년이 됐고, 청년은 양계장에서 살고 거리에서 자며 중년이 됐다. 마흔 넘어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 의탁하고 있을 때 일자리를 주겠다며 다가온 남자가 있었다. 봉고차에 태워 전남 목포로 내려간 남자는 여관에 그를 두고 소개비만 챙겨 떠났다. 이튿날 여관에 소개소까지 운영하는 다방 사장이 와서 그를 염전으로 데려갔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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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주나 휘파람 소리.



(남인수가 1938년에 발표한 ‘애수의 소야곡’. 이노홍 작사·박시춘 작곡)





운다고 불길이 열리진 않았다.



“고인을 모시고 와버렸다고요? 안 돼요. 안 돼.”



접수처 직원이 손과 고개를 한꺼번에 저었다.



“이렇게는 화장 자체가 안 된다니까요.”



이소아(공익변호사와함께하는동행 소속 변호사)는 답답했다.



“아니 ‘이렇게 하라’고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2월2일 일요일) 여기서 ‘이렇게는 안 된다’라고 하면 너무 황당하잖아요.”



접수대 앞에 주저앉아 누군가와 통화하던 이기림(동행 소속 사회복지사·34)이 토막 친 울음을 터뜨렸다.



“가족 한명 없이 사시다 가신 분을,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요.”



‘가신 분’은 화장 예약 시간을 넉넉히 앞두고 도착했지만 화구를 배정받지 못해 운구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기 나흘 전 정진만(가명·62)은 가셨다.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이기림이 달려갔을 때 의료진은 “의식이 없다”라고 했다.



“아저씨, 밖에 눈 많이 와요.”



정진만이 눈동자를 창 쪽으로 보냈다. “저 알아보시겠냐”라는 말엔 눈을 깜빡였다. 그랬다고 이기림은 믿었다. 지난해 여름부터 입·퇴원을 반복했던 정진만이 갑자기 열이 올라 광주의 한 병원에 입원한 지 열흘째였다. 호흡이 편해지도록 기관 절개를 할지 의사가 물었다. 이기림은 “하지 않겠다”라며 울먹였다. 정진만은 연명치료에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오후 2시39분. 심장이 멈췄다. 다발성 장기부전과 간경변증이 사인이었다. 복막전이암이 의심됐다. 하필 설날이었다.



“가해자들에게 사과 한마디라도 듣고 떠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이젠 그 기회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날 밤 소셜미디어에 부고를 전하며 이기림은 “너무 억울”했다. 7글자로 추린 정진만의 마지막 날들이 뼈처럼 앙상했다.



“염전을 떠나 3년….”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온다’라는 말은 단 것을 가진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었다. 쓴 것뿐인 사람은 쓴 것이 다하길 고대할수록 더 쓴 것들만 몰려왔다.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집을 팔아 남편의 노름빚을 갚고 고향을 떠났다. 11살에 초등학교를 중퇴한 소년은 중국집에서 배달을 하고 그릇을 닦으며 청소년이 됐다. 청소년은 공장에서 가방을 만들며 청년이 됐고, 청년은 양계장에서 살고 거리에서 자며 중년이 됐다. 마흔 넘어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 의탁하고 있을 때 일자리를 주겠다며 다가온 남자가 있었다. 봉고차에 태워 전남 목포로 내려간 남자는 여관에 그를 두고 소개비만 챙겨 떠났다. 이튿날 여관에 소개소까지 운영하는 다방 사장(숙박·인력 공급·유흥을 결합한 ‘원스톱 인신매매꾼’)이 와서 그를 염전으로 데려갔다. 염전 두곳에서 15년을 일했다. 첫번째 고용주는 2014년 1차 염전 사태(장애인 노동자 학대·착취) 때 가해자로 처벌됐고, 두번째 염주는 2021년 2차 사태 때 재판에 넘겨졌다. 그의 1년치 급여는 모두 합해도 마이너스 200만원이었다. 염주는 가불금이 임금보다 많도록 명세서를 꾸미고 향후 문제 삼으면 “본인(정진만)이 민형사상 책임을 진다”라는 서약에 지장을 찍게 했다. 염주와 그 아내, ‘소금 장인’으로 유명한 아버지에, 어머니까지, 일가족 전체가 가해자였다. 바닷물만 증발시킨다고 소금이 그토록 짤 리 없었다. 쓴맛뿐인 삶들을 녹이고 졸이며 소금은 염도를 높였다. 형사재판 2심(1심에선 염주 아내만 빼고 모두 징역형) 선고를 일주일 앞두고 정진만은 가셨다.





차라리 잊으리라 맹서하건만 못 잊을 미련인가 생각하는 밤.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으면 애타는 숨결마저 싸늘하고나.





“가족은 한분도 안 오신 거 맞죠? 지인은 100명이 와도 소용없어요.”



화장장 직원이 ‘지인’ 이기림·이소아를 보며 물었다. 정진만은 “서울에 친누나가 산다”라고 말하곤 했다. 이기림이 누나의 번호로 연락했을 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목포의 술집 사장이었다.



“뒤늦게 가족이라며 나타나서 왜 화장했냐고 소송 걸면 저희가 곤란해진단 말입니다.”



무연고 사망자가 발생하면 병원은 관할 행정기관에 통보해 가족 찾기 절차를 밟아야 했다. 가족을 찾지 못하거나 찾더라도 시신 인수 거부 의사를 확인해야 화장을 할 수 있었다. 그 절차를 빼먹은 병원 탓에 정진만은 화장장에 와서도 이승을 떨치지 못했다. “교통정리를 해드리겠다”라며 직원이 말했다.



“일단은 장례식장으로 다시 모시는 수밖에 없어요.”



이기림이 사태를 ‘이렇게’ 만든 병원에 항의했다. 병원은 사과했지만 정진만에게 사과한 건 아니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는 사과를 받지 못했다. “아무리 변명해도 그냥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기림은 전화를 끊으며 생각했다. “아저씨는 돈 되는 시신이 아니”었다.



정진만의 임박한 임종을 알리며 병원은 단호했다. “사망하면 한시간 안에 시신을 빼야 한다”라며 처리 방안을 결정해서 오라고 독촉했다. 염전에서 정진만을 구출(☞ 5회 ‘작전명 옹호’)한 3년 전부터 이기림은 그의 보호자 역할을 해왔다. 간병뿐 아니라 치료비와 장례비까지 부담했지만 가족이 아니란 이유로 병원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라며 화장장 이름도 말해주지 않았다. 이기림이 작별 인사라도 하게 해달라고 간청해 발인 직전 겨우 세시간짜리 빈소를 차렸다. “빈소만 빌려줘선 남는 게 없다”라며 “하루를 통으로 사용하려면 식사와 꽃장식까지 기본 500만원은 쓰셔야 한다”라는 말에 이기림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잘 가시라고. 가서 편하게 있으라고. 고생 많으셨으니까 거기서라도 편하시라고.”



고인의 몇 안 되는 ‘지인들’이 약식 추도식을 가졌다. “한마디 해달라”는 이소아의 요청에 홍일국(가명·57)의 말끝이 울컥 떨렸다. 이기림의 부탁으로 양복을 찾아 입고 온 최창범(가명·51)이 영정을 들었다. 두 사람도 정진만과 같은 염전에서 일했고, 정진만보다 먼저 탈출했으며, 정진만과 같은 재판의 원고들이었다. 탈출 뒤 지적장애 판정을 받은 두 사람에겐 활동지원과 연금, 복지관 서비스라도 제공됐지만 경계선 장애를 가진 정진만은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스스로를 방치”했다.



“저 때 얼굴이 그나마 환했는데.”



최창범의 품에서 착하게 웃고 있는 정진만을 보며 이기림이 말했다. 장례식장에서 너무 과하게 보정한 바람에 영정은 사진이라기보다 그림에 가까웠다. 영정에서 가지런한 그의 치아가 원본에선 산산이 깨져 있었다. 고된 노동으로 이가 상하자 염주는 무허가 치기공사를 불러 생이빨을 갈아버리고 500만원을 가불 처리했다.



원본과 영정의 차이는 치아 말고도 더 있었다. 하얀 와이셔츠에 푸른 넥타이 차림인 그에게 영정은 검은 양복을 입히고 회색 넥타이를 둘렀다. 푸른색은 지역별 지파마다 상징색이 다른 한 종교 집단의 광주·전남 쪽 색깔이었다. 염전은 벗어났으나 가난과 외로움을 벗어나진 못한 그에게 푸른 넥타이들이 찾아왔다. 그들이 제공하는 ‘관계’가 고팠던 정진만은 그들이 파는 보험에 들고 그들이 할당한 구역 회비를 내느라 얼마 없는 통장을 비웠다.



“전자우편과 팩스가 다른 게 있나요? 왜 다르죠? 왜 달라요?” “공문을 팩스로 보내면 접수가 안 된다”라는 화장장 쪽에 이소아가 “이해할 수 없다”라며 거듭 물었다. 지난한 저승길이었다. 시신을 장례식장으로 되돌리기 직전 연락된 목포시(정진만 주소지) 공무원이 휴일인데도 출근해 공문을 써줬다. 가족 찾기 절차를 거쳐야 하는 무연고 장례 대신 이기림을 연고자(장사 등에 관한 법률 2조 16호 아목 ‘시신이나 유골을 사실상 관리하는 자’)로 해석해 장례가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이기림이 정진만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며 시청에 제출해둔 서류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입증해줬다. 그 공문을 화장장은 “전자우편으로만 받을 수 있다”라고 고집했다. 시청 공무원이 직접 통화하며 팩스 접수를 설득했다. 이 모든 곤란을 거친 뒤에야 정진만은 간신히 불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만은.”



뼛가루로 뿌려지는 정진만을 보며 이기림의 머릿속에선 오래된 노래 한곡이 가물거렸다. 아저씨가 즐거워할 만한 일을 고민하던 이기림이 목포에 오는 ‘전국노래자랑’(2023년 2월) 예심 출전을 제안했다. 좋고 싫음을 잘 드러내지 않던 그가 의외로 “냉큼 그러자”라며 연습에 응했다. “옛날 옛날 정말 옛날” 노래를 구슬프게 잘도 부르더니 정작 예심 당일 그는 포기했다. “연차를 못 냈다는 이유였지만 그냥 쑥스러웠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평생 이용만 당했던 순한 아저씨가 그때마다 누구를 떠올리며 그 노래를 흥얼거렸을지 이기림은 궁금했다. 아무리 소금을 쳐도 싱겁기만 했을 그의 사랑과 청춘이 애달팠다.





무엇이 사랑이고 청춘이던고 모두 다 흘러가면 덧없건마는. 외로운 별을 안고 밤을 새우면 바람도 문풍지에 싸늘하고나.



한겨레

이문영 | 문화부 기자. 책 ‘웅크린 말들’ ‘노랑의 미로’ ‘왼쪽 귀의 세계와 오른쪽 귀의 세계’ ‘루카스’ 등을 썼다. 세기적 사건의 주인공이 되진 못해도 누구든 자신만의 ‘작은 이야기’(小說)의 주인공은 될 수 있다. ‘이야기의 자격’을 인정받은 적 없는 이야기들이 글이 되고, 읽히고, 연결될수록 언어와, 기록과, 서사의 틈들도 조금은 메워질 것이라 믿는다. 부끄러운 것이 많다.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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