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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에는 ‘기게스의 반지’라는 우화가 나온다. 평범한 양치기였던 기게스는 지진으로 갈라진 땅 속에서 반지를 발견하는데, 그 반지를 끼면 투명인간이 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는 반지의 힘을 이용해 왕을 살해하고 왕비와 결혼해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오른다. 플라톤이 이 우화를 통해 던지는 철학적 질문은 이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즉 감시받지 않을 때도 인간은 여전히 정의로울 수 있는가?”
윤석열에게 검찰 권력은 기게스의 반지와 같았다. 검찰 권력 덕분에 남들에게는 칼을 휘두르면서도 자신의 치부는 철저히 가릴 수 있었다.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을 수사하며 ‘정의로운 검사’라는 정치적 이미지를 얻었다.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위기에 처할 때도 있었지만 검찰 권력이라는 기게스의 반지를 끼고 있는 한 모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투명인간이 될 수 있었다. 남들의 약점은 마음껏 공격하면서도 자신의 약점은 공격받지 않으니 천하무적이 아닐 수 없다. 기게스가 결국 반지의 힘으로 왕위를 찬탈했던 것처럼 윤석열 역시 검찰 권력을 등에 업고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기게스의 반지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반지의 신묘한 힘이 펼치는 ‘쉴드’는 윤석열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윤석열 부인 김건희야말로 반지의 최대 수혜자였다. 대표적인 사건이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이다.
뉴스타파가 처음으로 김건희의 도이치모터스 사건 주가조작 연루 의혹을 보도한 게 2020년 2월이다. 그해 4월 최강욱 전 의원과 황희석 전 법무부 국장 등이 김건희를 검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검찰이 ‘형수’를 수사할 리 없었다. 반지가 반지의 주인을 공격할 수 없는 것처럼.
결국 1심에서 주범들이 유죄 판결을 받고 비판 여론이 비등해진 뒤에야 검찰은 뒤늦게, 고발 이후 무려 4년 3개월 만에 김건희를 소환 조사했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검사들이 휴대폰을 빼앗긴 채 이뤄진 이른바 ‘황제조사’였다. 이후 2심에서는 김건희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쩐주’ 손 모 씨마저 주가조작 방조 혐의로 유죄를 받았다. 그럼에도 검찰의 최종 결론은 김건희 불기소였다. 불기소를 설명하는 보도자료에 김건희에게 유리한 사실만 편향적으로 써넣은 검찰은 ‘김건희 변호인단’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야했다.
벗겨진 반지, 벌거벗은 임금님
2025년 4월 4일, 헌법 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파면을 선고했다. 그는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니다. 이제 윤석열을 보호해주는 힘은 사라지게 된다. 윤석열의 손에서 기게스의 반지가 벗겨지고 만 것이다. 반지를 빼앗긴 기게스는 평범한 양치기보다도 못한 존재다.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초라하게 벗겨진 장막 아래서 우리가 목도하게 될 것은 벌거벗은 임금님일 것이다. 얼마나 많은 불법이 저질러졌을 것이며 이를 은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권력 남용이 벌어졌을 것인가.
사실 우리는 지난 12.3 내란 이후 이미 그 벌거벗은 임금님의 한 면모를 목격해왔다. 검찰 권력의 보호와 아우라가 없는 윤석열은 그저 망상에 빠진 음모론자이자 서투른 선동가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이제부터는 윤석열 김건희 부부가 저질러 온 온갖 비위와 부패, 권력 남용의 실체가 하나씩 햇빛 아래 드러나게 될 것이다. 보이지 않았던 권력의 구조가 드러나고 그 안에 숨어있던 ‘그녀’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문도 열리게 될 것이다. 밝은 햇빛 아래서 앞으로 몇 달 동안, 혹은 몇 년 동안 우리는 이런 말을 반복해서 외치게 될 것이다. “보라, 저들은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대법원은 어제(4.3) 도이치모터스 사건 주범들의 유죄를 확정했다.
플라톤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감시받지 않을 때도 인간은 여전히 정의로울 수 있는가?” <국가>에서 플라톤에게 입을 빌려주는 소크라테스의 답은 놀랍게도 “그렇다”이다. 감시가 없는 조건에서라도 인간은 ‘이성의 힘’으로, 더 정확히 말하면 이성과 의지와 욕망이 이루는 조화의 힘으로 인해 정의로울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소크라테스보다는 그 반대편에 선 글라우콘의 주장에 더 동조할 것이다. 감시받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힘을 손에 넣은 사람은 계속해서 정의로울 수 없다, 즉 타락하고야 만다고 글라우콘은 주장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근대의 공화정과 민주주의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글라우콘의 주장을 전제로 설계됐다. 즉 권력의 남용과 부패를 막는 것은 개인의 선의가 아니라 시스템에 기댈 때만 가능하다는 전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윤석열의 손에서 벗겨진 기게스의 반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도 명확해진다. 이번에는 다른 인물, 더 선한 인물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면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선한 인물이라고 해도 그 반지를 손에 넣는 순간 왕을 죽이고 왕비와 결혼하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런 반지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물건이다. 주권자의 감시와 책임에서 벗어난 권력이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반지를 어떻게 파괴할 것인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프로도와 샘처럼 죽을 힘을 다해 ‘불의 산’에 가져가 용암 속에 던져야 하는 것인가? 물론 그런 지난한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다음 정부의 과제다.
뉴스타파 심인보 inbo@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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