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터=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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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가 과분하게도 유일한 진정한 글로벌 통화로 자리 잡은 이유를 설명하려 할 때, 경제학자들은 흔히 미국의 세계 GDP 비중이나 미국 금융시장의 두터움 및 탄력성과 같은 구조적 요인들을 지목한다.
이러한 접근은 많은 금융시장 참여자들이 공유하는 낙관적 관점을 뒷받침한다. 즉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미국이 세계 최대 경제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한, 달러는 계속해서 안전자산 역할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하지만 제2차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은 숫자가 모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역사가들이 말해주듯, 국제통화의 부상과 쇠퇴를 결정짓는 것은 추상적인 경제나 시장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의 행동이다. 국제 달러 체제를 만든 것도, 그 기반이 되는 제도를 구축한 것도 결국 사람이었고, 그 제도가 지속될 것인지 무너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결국 사람들이다.
국제통화로서 달러를 낳은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마도 폴 워버그(Paul Warburg)일 것이다. 그는 독일 함부르크의 명문 은행가문인 바르부르크(Warburg, 영어식 발음으로 '워버그') 가문 사람으로서 젊은 시절 함부르크, 파리, 런던에서 국제 금융 업무를 익혔고, 1895년에는 혼인을 통해 미국의 쿤 로브(Kuhn Loeb) 은행가문에 연결되어 1902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폭넓은 국제 은행 업무의 경험을 통해 워버그는 전 세계 각지의 상인과 은행가들이 무역 신용과 투자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런던을 거점으로 삼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당시 미국도 역시 국제 신용의 대부분을 런던과 파운드화에 의존하고 있었다.
귀화 국민으로서 워버그는 미국에 대한 충성심이 깊었다. 그는 미국 경제가 런던과 파운드화에 의존하고 있어서 직접 통제할 수 없는 해외 변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점을 우려했다. 영국의 국제 금융 중심지로서의 위상은 단순한 민간만의 역량이 아니라, 시장에 유동성과 안정성을 뒷받침해주는 영국 중앙은행, 즉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의 역할에 기댄 것이었다. 미국이 국제무역에서 달러의 사용을 확대하려면, 중앙은행이 없는 한 근본적인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그는 판단했다.
이에 따라 1906년부터 워버그는 중앙은행 설립을 위한 공개적 논의의 선봉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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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빈 에디팅 디렉터 subin.kim@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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