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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2 (화)

홍콩섬 최고봉 찍고 ‘용의 등허리’ 향해 뚜벅뚜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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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피크’ 전망대에서 보이는 홍콩 전경. ‘홍콩트레일’의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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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홍콩 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1시30분이었다. 공항은 고요했다. 착륙장을 밝히는 주황색 활주로등 불빛만이 이제 막 도착한 이들을 말없이 환영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입국 절차를 신속하게 마친 그들은 컨베이어벨트에서 각자의 수화물을 찾아 어딘가로 유유히 사라졌다. 나도 배낭을 찾아 도착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공항에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후에 소화해야 할 여정을 생각하면 잠을 충분히 자둬야 했다. 공항에서 가장 조용한 장소를 찾았다. 떠날 비행기가 더는 없어 한가한 출국장이 최적의 장소였다. 이곳 명당은 먼저 온 방랑자들이 차지했지만 다행히 구석진 데에 의자 하나가 남아 있었다. 침낭을 펴고 안대를 꺼낸 뒤 길게 누웠다. 두 다리를 곧게 뻗을 수 있다는 점만으로 만족감이 밀려왔다. 문득 인도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서 마지막으로 공항 노숙을 했던 2011년 여름이 떠올랐다. 하지만 쏟아지는 잠에 그날의 기억이 흐려져갔다.



5년 전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홍콩 거리. ‘홍콩트레일’은 걷기 여행의 성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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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꾸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여행은 시작된다. ‘나그네 여’(旅) 자에 ‘다닐 행’(行) 자. 친숙한 곳을 벗어나 낯선 곳에 머물거나 떠도는 이 행위가 내 삶의 커다란 한 축이 된 지도 10년이 넘었다. 공항은 물론 늦은 밤 기차역과 이른 새벽 터미널에서 혹여 납치라도 당할까, 짐을 도둑맞을까 뜬눈으로 밤을 보낸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 시절 긴 여행은 이제 빛바랜 청춘의 추억으로만 남았지만 나는 여전히 꿈꾼다. 들어본 적도 없는 마을에서 마을로, 오직 산을 따라 이역만리의 나라를 여행하는 날들을 말이다.



한편, 가까운 나라를 여행할 때 얻는 특별한 감흥과 감각도 있다. 익숙함과 편안함이다. 처음 가는 나라를 여행하는 것보다 분명 두려움과 불안함이 덜하다. 예전보다 어디가 어떻게 변했는지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좋아했던 장소에 가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다 보면 현재의 소중한 의미도 발견한다. 특히 도시는 어디를 가도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먹고 잘 곳을 가뿐하게 구할 수 있어 든든한 여행지가 된다.



무려 5년 만에 다시 찾아온 홍콩. 마지막으로 홍콩에 왔을 때가 2019년 12월이었다. 당시 홍콩은 중국 정부에 자치권을 요구하는 민주화 시위로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문을 닫은 상점도 많았다. 언제 어디서 돌연 시위가 일어날지 몰라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해외 여행객이 줄자, 유명 호텔과 리조트는 연일 저렴한 숙박 상품을 내놓았다. 여행 커뮤니티에선 도리어 ‘지금이 물가 비싼 홍콩을 여행하기에 적기’라는 말도 돌았다.



5년 전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홍콩 거리. ‘홍콩트레일’은 걷기 여행의 성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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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홍콩에 도착한 지 8시간 만에 공항을 벗어났다. 2층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창 너머로 5년 만에 다시 만난 홍콩을 구경했다. 하늘을 꽉 메운 구름이 예보하듯 이날은 비 소식이 있었으나 피할 도리는 없었다. 버스는 공항이 있는 란타우섬을 벗어나 해양도로를 가로질러 1시간 뒤 홍콩섬에 도착했다. 코즈웨이베이역에서 숙소로 향했다. 미로 찾듯 겨우 도착한 숙소는 영화 ‘중경삼림’의 주인공들이 살던 청킹 맨션과 유사했다. 내부는 의외로 넓고 아늑했다.



배정받은 10인실 남녀 공용 도미토리에 머무는 사람들은 대체로 장기 숙박자들이다. 짐을 보면 단박에 안다. 지중해 동부에 있는 섬나라 사이프러스에서 온 20대 청년 키리아와 인사를 나눴다. 아침부터 등산화 끈을 묶고 있는 그에게 행선지를 물었다. 그는 ‘타이모산’에 간다고 했다. 해발 957m의 홍콩 최고봉 타이모산을 모를 리가 없는 나다. 함께 가겠느냐고 그가 물었다. 타이모산은 쾌청한 날에 가고 싶었다. 5년 전 타이모산에 갔던 날도 이날처럼 흐려서 제대로 된 풍경을 볼 수 없었다. 키리아의 무사 산행을 빌었다.



‘홍콩트레일’은 걷기 여행의 성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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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가붓한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어느덧 정오. ‘오후 여정’을 시작할 시각이 온 것이다. 비를 대비해 방수 재킷도 챙겼다. 일단 정처 없이 산이 보이는 방향으로 걸었다. 다리가 움직이는 대로도 걸었다. 이건 일종의 나만의 의식이다. 익명의 사람들로 가득한 도심 속을 생각 없이 거니는 것 말이다. 여행하는 나라에 스며드는 나만의 방식이다. 두개의 지하철역을 지나자 비로소 산으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빅토리아 피크’로 가는 길이었다.



‘홍콩트레일’ 코스를 알려주는 표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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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552m의 ‘빅토리아 피크’는 홍콩섬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홍콩의 야경 명소 중 하나로, 정상까지 버스나 전차로 올라갈 수 있다. 밤낮 구분 없이 남녀노소 많은 관광객이 찾는 여행지다. 구불구불 뱀처럼 이어지는 아스팔트를 거슬러 올라 ‘빅토리아 피크’에 도착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은 ‘여기가 바로 홍콩이야’라고 외치고 싶게 했다. 조금의 양보도 없이 보란 듯이 각자의 위용을 뽐내는 도시와 자연은 서로를 견제하는 동시에 끌어안으면서 한 몸을 이루고 있었다.



흔히 ‘피크’라고 부르는 이 산은 홍콩섬의 서쪽과 동쪽을 길게 가로지르는 ‘홍콩트레일’의 시작점이다. 홍콩트레일은 능선을 타고 걷다 보면 홍콩의 바다와 빌딩 숲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전세계 하이커(심신 단련이나 관광 목적으로 걸으며 여행하는 이)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트레킹 코스다. 총 8개 구간으로, 구간별 거리는 5~7㎞ 정도에 이른다. 홍콩트레일의 백미는 단연 마지막 구간에 해당하는 ‘드래건스 백’이다. 용의 등허리처럼 생긴 길이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이 길은 2004년 미국 매체 ‘타임’이 아시아 최고의 트레킹 코스로 꼽은 데다.



이날 피크의 정상에 선 발길은 나도 모르게 홍콩트레일의 깊은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글·사진 장보영 ‘아무튼, 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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