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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목)

졸속 개헌론, 헌정파괴세력은 있고 ‘시민’은 없다 [김민아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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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을 선고한 다음날인 5일 ‘윤석열 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주최로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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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식 국회의장이 ‘조기 개헌론’을 제기했다. 차기 대통령선거와 헌법 개정 국민투표를 동시에 실시하자는 내용이다. 대선은 늦어도 6월 3일에는 치러지게 된다. 앞으로 57일 남았다(4월 7일 기준). 개헌이 성사된다 해도 졸속이 될 가능성이 크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의롭지 못한’ 개헌이 될 것이란 점이다. 5W 1H 원칙에 따라 짚어본다.

누가(Who)?

우 의장의 개헌 제안에 가장 반색한 건 국민의힘이다.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은 “개헌에 동참하고 당 개헌특위에서 (개헌)안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의힘은 헌법의 명령으로 쫓겨난 내란수괴를 출당시키기는커녕 상왕 모시듯 하는 정당이다. 당 안팎의 내란세력과도 절연하지 않고 있다. 사과도 반성도 쇄신도 없다.

지금 존재하는 헌법도 외면하는 정당을 새 헌법 만드는 테이블에 앉힐 수는 없다. 그것은 헌정질서파괴세력에 “이대로 가도 된다”며 관용을 베푸는 일이다.

언제(When)?

‘라이브’로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데 122일이나 걸렸다. 윤석열은 승복하지도, 사과하지도 않고 있다. 서울 한남동 관저조차 비우지 않은 채 지지층 결집 메시지를 내고 상왕 노릇을 하는 터다. 사법 기득권과 극우 개신교·유튜버로 이어지는 카르텔도 여전하다. 헌정질서와 사법정의를 바로 세워야 할 이 때, 개헌 논의는 다른 모든 의제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말 것이다. 지금은 개헌의 타이밍이 아니다.

헌법과 국민투표법에 따르면, 개헌안 발의부터 국민투표까지 최소 38일이 걸린다. 개헌안은 국회 의결 전 대통령이 20일 이상 공고해야 한다. 의결 후 국민투표에 붙이려면, 투표일 18일 전까지 투표일과 투표안이 공고돼야 한다. 이를 역산하면 국회에서 앞으로 19일 안에 개헌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평범한 법률안 하나 통과시키는 데도 빠듯한 시간이다. 일부에선 국민투표법을 개정해 ‘18일 공고 규정’을 축소하자고 하는데, 어불성설이다.

어디서(Where)?

12·3 비상계엄 선포 후 국회 앞으로 달려가 계엄군을 막아선 건 광장의 시민이었다.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을 이끌어낸 것도 광장의 시민이었다. 눈보라 속에서 밤새워 윤석열 체포를 촉구한 ‘키세스 시위대’도 광장의 시민이었다.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을 이끌어낸 이 역시 광장의 시민이었다.

뜬금없는 개헌론은 광장의 승리를 제 것인양 여기고, 시민의 트로피를 가로채겠다는 정치권의 책략일 뿐이다. 개헌 논의가 필요하다면 여의도의 고급 식당이 아니라 전국 곳곳의 ‘광장’에서 시작돼야 한다.

지난 1월 5일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에서 시민들이 윤석열 체포를 촉구하고 있다. 이들이 눈보라와 추위를 막기 위해 은박 담요를 두른 모습이 ‘키세스 초콜릿’을 닮아 ‘키세스 시위대’라는 별명을 얻었다. 정혜경 의원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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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What)?

헌법은 크게 기본권과 권력구조 두 부분으로 이뤄진다. 우 의장은 대선과 함께 1차 개헌을 해 권력구조부터 바꾸자고 했다. 나머지 개편 과제는 내년 지방선거 때 2차 개헌을 하면 된다는 것이다. 앞뒤가 바뀌었다. 권력구조는 기본권이란 내용을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형식일 뿐이다.

우 의장은 권력구조 개편 방향과 관련해 “대통령 4년 중임제에 대해 여야 정당간 공감대가 있는 것 같다”고 했는데, 누가 여야에 권력구조를 결정할 권한을 줬나. 현재의 5년 단임제는 1987년 6·10 항쟁의 결과물이다. 시민이 피로 쓴 헌법이다.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꾼다고 제왕적 대통령의 부상을 막을 수 있나. 외려 4년간 숨죽였던 대통령이 재선 후 독재로 치달을 가능성은 없을까.

어떻게(How)?

우 의장은 “국민주권과 국민통합을 위한 삼권분립의 기둥을 튼튼하게 세우기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개헌의 절차와 과정부터 국민주권에 기반할 일이다. 졸속 개헌은 또 다시 권력 상층부 엘리트들의 ‘짬짜미’로 결론 날 가능성이 크다. 주권자인 국민은 소외되고 말 것이다.

개헌을 추진한다면, 지난 넉 달 간 광장에서 울려퍼진 사회대개혁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숙의 민주주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연령·성별·지역·직업·계층이 고루 반영된 주권자 그룹을 구성해 전문가들과의 토론을 거쳐 개헌안 초안을 마련해야 옳다.

왜(Why)?

근본적 질문이다. 윤석열이 파면된 지 사흘 지났다. 파면 이후 가장 시급한 과제가 권력구조를 바꾸는 일인가? 헌법이 잘못돼서 윤석열이 내란을 일으켰나? 잘못됐다면 이전 대통령들은 왜 그러지 않았나?

간신히 일상으로 돌아간 시민들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당장 바라는 게 뭔지. 기업은 트럼프발 ‘관세 전쟁’으로, 자영업자들은 최악의 불황으로 고통받고 있다. 청년은 일자리가 부족하고, 고령자는 노후가 불안하다. 노동자와 여성·성소수자·장애인은 구조적 차별에 시달린다.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꾸면 이들의 삶이 나아지는가. 구체적으로 설명해보라.

개헌은 수단일 뿐 목표가 아니다

“시민이 정치체제 자체를 제거하지 않고도 통치자를 제재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지배 형태.”

정치이론 연구자인 한스 포어랜더 독일 드레스덴공대 교수는 저서 <민주주의-역사, 형식, 이론>에서 민주주의를 이렇게 정의했다.

4월 4일 오전 11시 22분 한국 시민은 민주주의의 추상적 정의(定義)를 실체적으로 구현해냈다. 그 기반은 지금의 헌법이었다. 개헌은 보다 민주적이고 정의로우며 번영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개헌 자체가 목표일 수는 없다.

지난해 12월 4일 새벽. 계엄해제 요구안 표결을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모인 의원들은 우 의장에게 “당장 상정하라”고 외쳤다. 계엄군이 유리창을 깨고 진입하던 급박한 상황이었다. 우 의장은 의연했다. “절차가 잘못되면 문제”라며 의결정족수 확보 여부를 확인한 뒤 차분히 결의안을 가결시켰다. 지금의 우원식은 그날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다.

경향신문

김민아 경향신문 칼럼니스트


김민아 경향신문 칼럼니스트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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