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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구한 미주리함, 윤봉길 의사 한도 풀었다..진주만의 함포, 지금 누구를 겨누나[함영훈의 멋·맛·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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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항복시키고 한국전쟁에서 우리를 구한 미주리함의 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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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일본에 대한 미국의 분노가 담긴 진주만 기념관 “기억하라 진주만” 포스터



진주만에서 희생당한 수병 동상. 결연한 모습으로 미주리함이 정박된 진주만 한복판을 응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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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호놀룰루 진주만)=함영훈 기자] 우리가 하와이로 가는 이유는 아름다운 휴양지 호놀룰루 와이키키와 글로벌 만남의 광장 아웃리거 외에, 쿠알로아 랜치, 터틀비치, 코올리나를 비롯한 오아후섬 동·북·서쪽의 매력과 빅아일랜드·카우아이·마우이 섬 등이 가진 자연의 신비를 감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한미동맹의 씨앗을 뿌린 하와이 이민 122년사와 잘 알려지지 않은 하와이 한인들의 독립운동, 우리의 광복과 이어지는 일본의 항복 서명식을 하고 한국전쟁에 참전해 대한민국을 지켜준 미주리함의 노고와 이 함대에 곁들여진 윤봉길 의사의 한풀이 스토리 역시 우리의 발길을 하와이로 안내한다.

일본이 자행한 오아후섬 진주만의 비극을 잊지말자는 취지로, 미국은 진주만 국립기념관을 만들었고, 진주만 한복판에 있는 포드섬 동편, 이 국립기념관을 정면으로 보는 쪽에, 국가기념물로 미주리함을 정박해 두었다.

미주리함 정박 데크로 가는 다리앞 니미츠함장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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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기념관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포드섬 동쪽 해안에 내리면, 수많은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니미츠 함장의 동상이 반기고, 수십개 성조기가 부두와 배를 연결하는 브릿지 양쪽에서 펄럭이며 관람객들을 의전한다.

▶성조기 물결과 수병의 키스

미주리함 입구로 가기 직전, 세계대전 승리 후, 아름다운 여성에게 키스를 하는 수병의 모습이 조형물로 만들어져 있다.

태평양 전쟁 승리후 귀국한 수병의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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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해설사 윤희주씨는 “여전히 일본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인은 줄고 한국인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래서 최근 미주리함 동아시아인 역사문화해설사의 수를 한국인 3명, 중국인 3~4명, 일본인 9명으로 조정했다”고 말했다.

하와이를 방문하는 한국인 대 일본인의 비율은 10여년 전 만에도 1대10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1대5 정도로 좁혀졌다고 한다.

그러나 미주리함을 탐방하고 나면, 2400여명의 미군과 미국인을 죽인 일본의 국민들은 죄책감에 덜와야 하고, 진주만·미주리함 유적에 자긍심을 가질 한국인들은 더 와야 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된다.

성조기 숲을 지나, 카메라 광각을 써도 한 앵글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미주리함을 마주대한다.

뉴욕브루클린 해군조선소에서 만들어진 미주리함은 길이 270.4m, 폭 33m, 높이 66m, 최대속도 33노트(61km/h)로 당시로서는 상상못할 역작이고 첨단기술이 총동원됐다고 윤 해설사는 설명했다.

주포 16인치 50구경(최대사거리: 42km) 9문, 부포 5인치 38구경(최대사거리: 16km) 12문, 대공방어력 팰렁스 발칸 4기, 토마호크 미사일(사거리 1600km), 순항 함대지 미사일 32기, 하푼 대함 미사일(100km) 16기로, 일본, 북한, 중국, 중동반미세력 등 적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관람객의 핵심 포토존인 주포는 1.2톤 무게의 철갑 관통탄과 0.8톤 무게의 고폭탄을 쓴다. 맞으면 큰 빌딩도 무너진다.

진주만 국립기념관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미주리함이 정박해 있는 포드섬에 오면 담벽 구멍 사이로 거물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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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엄호

USS 미주리함 (BB-63) ‘마이티 모’는 미국의 마지막 전투함이다. ‘최후의 전함’이라고 불린다.

1944년 6월에 취역한 미주리함은 진주만 습격을 당한 미국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굴복시키는 1등 공신이었고, 한국전쟁에 투입돼 대한민국을 북한과 중국공산당으로부터 지켜낸 선봉장이었다.

앞서 1941년 12월 일본은 향후 태평양에 대한 주도권을 방해할 주적인 미국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해 2403명의 미군과 미국인을 죽이고 18척의 배, 여러 대의 비행기를 파괴했다.

국립기념관에는 아리조나함이 물 속에 가라앉은채 미주리함과 머리를 맞대고 있고, 진주만 습격때 많은 죽임을 당했던 미국 청년 수병들을 형상화한 동상이 매서운 눈빛으로 태평양을 응시하고 있다.

미국이 태평양전쟁 참전을 선언하면서 일본을 무찌르겠다는 미국 청년들의 자원 입대가 잇따랐고, 미주리함 등 최신 병기가 태평양에 모습을 드러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8개월전, 일본이 무단 점거하던 독립국 유구(오키나와)국 상륙작전 때 미주리호는 강력한 함포사격으로 일본군 해안진지를 초토화시키고 미국의 손쉬운 승리를 견인했다.

인천상륙작전때 적을 교란시키 위해 삼척 앞바다에서 포격을 하고 있는 미주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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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엔 연합군의 주력인 미주리함은 적을 기만하는데 활용되었다. 주력함이 가는 곳은 상륙작전이 벌어지는 곳이라는 적의 오판을 빚어낸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사흘전 미주리함은 상륙 장소를 속이기 위해 서해의 인천이 아닌 동해의 삼척 앞바다에 머무르고 있었다. 405미리 주포로 지상에 맹렬한 사격을 가했으니, 적군으로선 삼척쪽으로 전력을 이동시킬 수 밖에 없었고 인천상륙은 손쉽게 성공한다.

▶윤봉길의사의 한을 풀어준 미주리함

미주리함은 영화 ‘국제시장’에서 비교적 실감나게 묘사된 흥남철수작전(1950년 12월)때에도 최후까지 남아 거대한 함포로 중공군 접근을 막음으로써 더 많은 국민을 구하고, 우리 한미 연합군의 전력 손실을 최소화했다. 1950년 8월~1951년 3월, 1952년 9월~1953년 3월 두 번 대한민국을 지켰다.

진주만 기습을 당할때 침몰한 아리조나함(흰색 기념관)은 수장된 채로 수호신 미주리함과 머리를 마주하고 있다. 미주리함 지령실에서 본 아리조나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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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간의 세심한 건조작업 끝에 취역 5개월전 진행된 진수식은 취역 당시 미주리주 상원의원이었던 해리 트루먼의 딸 메리 마가렛 트루먼이 주도했다.

미주리함은 군 생활을 두 번한다. 1955년 2월 퇴역했지만, 다시 1986년 5월 중동전쟁에 참전한다. 최종퇴역은 1992년 3월 31일이다.

미주리함은 한국과 또하나의 인연을 맺었다. 1945년 8.15광복을 맞은지 보름 남짓 지난 9월 2일, 도쿄 앞바다에 정박한 미주리함의 테크(Surrender Deck2)에서 일본의 항복문서 서명식이 있었다.

미주리함에 붙어 있는 대형 일본항복 서명식 사진. 지팡이를 짚고 있는 자가 윤봉길 의사의 폭탄에 맞은 항복서명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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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자는 바로 윤봉길 의사의 상해 거사때 부상을 입은 자(시게미쓰 마모루)였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미주리함에 타서 고개를 조아리던 모습은 윤봉길 의사를 비롯한 우리 한민족에겐 통쾌한 복수 같은 장면이었다.

윤봉길 의사는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에 이어 상해 까지 점령한뒤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진행된 승전기념식에 폭탄을 날려 상해파견군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장, 제 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육군 중장, 제 3함대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해군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상해 총영사 무라이 구라마쓰, 상해 거류민 단장 가와바라 사다쓰구, 상해거류민단 서기장 도모노 모리에게 중경상을 입히고 1명을 제거했다.

당시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던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일본이 항복하기 전, 외무대신으로 승진해 항복에 서명하는 치욕의 인물이 되었다. 남을 짓밟다가 입은 부상은 거기에 끝나지 않고 나라의 패망, 항복문서 서명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미주리함 서명식과 함께 ‘공식’ 광복을 맞았다.

블루하와이안 헬리곱터 투어를 하면서 하늘에서 본 미주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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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카미가제와 강요된 죽음

일본군이 서툰 솜씨의 소년 조종사를 앞세워 감행한 카미카제 공격도 이겨낸 미주리함이다. 미주리함 함미쪽으로 가면 외관 강철이 약간 휘어져 있다. 고개를 숙여 자세히 봐야 직선이던 외관 후판이 완만하게 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서툰 비행솜씨의 소년이 자살 공격을 감행했다가 날개만 스친채 수장되고 말았다. 사이판의 ‘자살 절벽’ 등에 대한 현지 탐문 고증 결과에서 보듯, 패색이 짙던 일본군인, 군속, 일본에 부역하던 현지인, 징용자들의 자살은 대부분 연합군에 포로로 잡혀 일본에 부정적인 팩트를 자백하지 않도록, 강요한 결과였다. 사이판에선 자살절벽 앞에선 일본군끼리의 총격 사살도 많았다. 미주리함 당시 함장은 이 불쌍한 자살 감행 일본 소년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1955년 2월 26일 미주리함은 공식적으로 퇴역하여 미 해군 예비함대에 편입되었으며, 퇴역 후 29년이 지난 1984년 최신 무기와 장비들을 탑재하는 현대화 작업을 거치면서 강력한 신형 전함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1986년 5월 10일 재취역해, 1991년 1,2월에는 이라크전쟁 사막의 폭풍 작전에 투입되어 해상에서 강력한 화력을 지원했다. 1991년 1월 17일에는 세계 최초로 이라크 목표물에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발사해 세계인의 시선을 모았다.

지금도 많은 미국인들이 진주만 기습 희생자 2403명을 애도하기 위해 진주만 국립기념관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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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기습 미국인 희생자 추모식이 마지막 임무

함수(뱃머리) 부분엔 14톤짜리 닻 2개가 있고, ‘크리스마스 트리’라는 별명의 안테나가 있다.

항해함교(Navigation Bridge 4층)는 전함의 운용과 조종을 위한 모든 명령과 지시가 내려지는 장소이다. 여행자는 이곳의 커맨더 빈자리에 앉아 명령하며 사진도 찍는다. 함교 중앙에 ‘시타델(Citadel)’이라고 불리는 방호구역이 있다. 외부함교(Open Bridge 5층)에 앉으면 함장이 된 기분을 느낀다.

함미에선 3대의 수상 정찰기, 헬리콥터, 원격조종 무인항공기 등의 이착륙이 이루어졌다.

1991년 12월 7일,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2000여명의 미군과 미국인이 주말에 편히 쉬다 숨진 진주만 피습 50주년 추모식은 미주리함의 두 번째 퇴역 마지막 임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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