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세금·복지제도를 통한 소득재분배 기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 수준인 것으로 분석됐다. 사진은 한 노인이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폐지를 실은 수레를 밀어 고물상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제정임 | 세명대 저널리즘대학원장
로버트 라이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2010년에 낸 책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에서 극우 ‘독립당’ 후보가 2020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는 가상의 장면을 묘사했다. “독립당의 기조는 명확하고 단호했다. 불법이민자에 대한 엄중한 조치,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의 합법이민 동결, 모든 종류의 수입관세 인상, 미국 기업의 타 국가 이전 또는 아웃소싱 금지….” 독립당이 아니라 공화당이었고, 2020년이 아니라 2016년으로 더 빨랐을 뿐,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을 놀라울 만큼 비슷하게 예측한 것이다.
라이시 교수는 여러 선행연구를 인용해 “역사적으로 소득과 부의 거대한 격차는 정치적 불안정을 낳았다”며 “사람들이 경제적 위협을 느끼고 삶의 안정을 상실할 때 기성정치가 희망을 주지 못하면, (이민자 혐오 등) 희생양과 단순한 해법을 내놓는 권력에 끌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패배 뒤 경제난에 빠진 독일에서 대중의 불안과 분노, 민족주의를 부추겨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것을 대표적 예로 들었다.
지난 4일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고 선고한 순간, 한국 민주주의는 한고비를 넘겼다. 한국갤럽의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의 81%가 헌재의 윤석열 파면 결정을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것으로 민주주의의 위기가 끝났다고 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난 몇달 동안 우리는 탄핵 반대 집회 등을 통해 국내에서도 극우세력이 팽창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이주민과 소수자 집단을 배척하고 민주적 절차와 법질서를 부정하며 기성 정치를 불신하는 민족주의·권위주의·반다원주의·반엘리트주의의 목소리가 광장에서 울려 퍼졌다.
파면 결정 뒤 기세는 약해졌어도 계속되는 집회와, 이들을 부채질하는 정치인, 유튜버 등의 행태는 향후 대선에서 ‘극우 결집’을 노린 선동이 더욱 심해질 것을 예고한다. 대기업·부유층은 세계 최상급의 부를 누리지만 노인빈곤율이 40%에 육박하고, 절반 가까운 노동자가 비정규직의 불안한 삶에 시달리는 한국 현실은 성냥불만 그으면 활활 타오를 기름통과도 같다. ‘소득과 부의 거대한 격차 속에서’ ‘경제적 위협을 느끼고 삶의 안정을 상실한 사람들이’ ‘희생양과 단순한 해법을 내놓는 권력에 끌리지 않도록’ 정치가 작동해야 한다.
그렇다면 집권 가능성이 커진 더불어민주당이나 방어에 나선 국민의힘은 이런 현실에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현재로선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경제적 불평등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개 ‘일하는 사람들이 합당한 보수를 받게 하는 것’(시장임금 개선), ‘증세와 복지 확충으로 재분배를 강화하는 것’(사회임금 개선), ‘금권정치를 막기 위해 선거제도 등을 개혁하는 것’(정치개혁)을 불평등 완화의 주요 과제로 꼽는다. 그런데 한국의 두 거대 정당은 이런 과제를 풀어나가려는 의지를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부자의 세금을 더 줄여주는 일’에 의기투합했다. 불평등을 더욱 확대하는 방향이다.
여야는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종합부동산세 완화, 가상자산 과세 유예를 단행한 데 이어 상속세 완화까지 논의하는 중이다. 한국의 조세와 복지제도를 통한 재분배 기능은 202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1개 회원국 가운데 28위로 꼴찌 수준이다. 그래서 저소득층은 물론 중산층도 비싼 주거와 교육, 의료 등을 각자 감당하며, 안전그물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한다. 불평등 피라미드의 하단일수록, 자신이 겪는 경제적 위협과 삶의 불안을 외면하는 기성 정치에 분노가 클 것이다.
한겨레는 여야의 감세 행진을 어느 언론보다 적극적으로 비판했고, 불평등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한 사설과 칼럼도 때때로 실었다. 그러나 점과 점을 이어 선과 면을 보여주는 종합적 접근과 집중력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감세를 비판하는 기사는 재정확보 방안 미흡을 지적하는 정도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한국 불평등의 현주소와 정치사회적 파장, 이를 완화하기 위한 재정의 역할을 환기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심층보도는 찾기 어려웠다. 시장임금 개선 등 다른 과제도 마찬가지다. 대선 정국의 보도는 달라지길 바란다. 불평등이 개선되지 않으면 위기는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정책에 관해 송곳 질문을 퍼붓길 기대한다.
▶▶민주주의, 필사적으로 지키는 방법 [책 보러가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