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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윤석열은 12·3 비상계엄령 나흘 후인 12월7일 오전 대국민 담화에서 “저의 임기를 포함하여 앞으로의 정국 안정 방안은 우리 당에 일임할 것이다. 향후 국정 운영은 우리 당과 정부가 함께 책임지고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에 전 국민의힘 의원 김웅은 “한심하다”며 “총기 난사범이 앞으로 다시는 총을 쏘지 않겠다고 말한다고 누가 그걸 믿어주나”라고 비판했다. 그는 “어차피 진심 어린 사과는 기대도 안 했다. 그 정도 책임감은 평생 보여본 적 없는 사람이라”며 “일생 동안 보수만 학살하다 가는구나”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검장과 검찰총장 시절 적폐 청산 수사를 통해 보수를 죽이더니 대통령이 되고 나선 비상계엄 선포로 보수를 죽이느냐는 비판인 것 같다. “일생 동안 보수만 학살하다 가는구나”라는 표현이 과장법일망정 가슴에 강하게 와닿는 게 있어 다시 음미해보았다. 결과론적일망정 윤석열이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체제에서 가장 치명적인 ‘보수 죽이기’를 했다는 걸 어찌 부인할 수 있으랴.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다. 그의 ‘보수 죽이기’에 국민의힘이 져야 할 책임은 없을까?
윤석열은 12·3 계엄으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긴 했지만, 그간 어리석은 과오, 아니 자해(自害)를 일일이 언급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많이 저질렀다. 그런데 국민의힘은 단 한 번도 그의 자해에 브레이크를 건 적이 없다. 걸려고 시도한 적도 없다. 물론 한동훈이 비상대책위원장과 대표 시절 ‘김건희 문제’와 관련해 몇 차례 시도하긴 했지만,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은 윤석열 이전에 윤석열에 대한 절대복종을 체화한 국민의힘의 실세인 친윤 의원들이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떼를 써서 자기 요구를 관철시키는 어린아이를 본 적이 있는가? 오랜 시간 학습을 통해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걸 알게 된 아이는 점점 더 일탈의 강도를 높여나가기 마련이다.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비유지만, 국민의힘은 공사(公私) 구분을 엄격히 해야 할 공적 조직이자 제도로서 윤석열의 일탈을 견제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힘은 그런 역할을 불경스럽다는 듯 아예 포기함으로써 계엄이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최악의 파국을 불러들이고 말았다.
국민의힘은 심지어 12·3 계엄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12월14일 국회 본회의에서 윤석열 탄핵소추안 가결에 협력한 책임을 물어 한동훈에게 집단적인 몰매를 가하면서 대표직에서 내쫓은 사건이 그걸 잘 말해준다. 이건 무얼 말하는가? 제도나 법 이전에 ‘강한 권력에 대한 맹종’이나 사적 의리를 앞세우는 부족주의적 문화나 체질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걸 시사해준다.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상식이 현실로 구현되는 순간, 목이 메어왔다. 그 순간 대학생이던 1990년대 초 어느 날이 떠올랐다. 수업을 가려고 신촌역 밖으로 급하게 걸어 나오고 있는데, 경찰로 추정되는 분이 가방을 낚아채고 검색했다. 그 이후 외출할 때마다 내 가방에 있는 책들을 스스로 검열하곤 했다. 학교 안팎에서 최루탄과 곤봉을 든 전경을 볼 수 있었던 민주주의 초기 모습이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그 시절을 산 적이 없는가? 누구 말처럼 계엄을 정말 “경솔한 한밤중의 해프닝” 정도로 생각하는가? 그래서 국민의힘 의원이나 당원이 탄핵에 찬성하면 그건 용납할 수 없는 배신인가? 또 그래서 헌법재판소의 4·4 탄핵 선고 이후 가진 의원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쏟아낸 건가?
“단합도 좋지만 기강을 잡아야 한다. 탄핵에 대해 공개 찬성하고 언론에 적극 알렸던 사람들을 조치해야 한다.” “미꾸라지 한두 마리가 흙탕물을 만든다. 분열을 안 하려면 정리해야 한다.” “책임을 물어야 한다.” “고름은 살이 되지 않는다.” “80석, 90석의 소수 정예가 되더라도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당을 해야 한다.”
중도·양비론 일방적 폭격에 개탄
윤석열은 보수만 죽인 게 아니다. 그는 중도의 목도 졸랐다.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대중의 인식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12·3 계엄 이후 많은 비판을 받은 단어가 있으니 그건 바로 ‘중립’과 ‘양비론’이다. 계엄엔 중립과 양비론이 있을 수 없다는 비판은 백번 옳지만, 덩달아 ‘중립’과 ‘양비론’이라는 단어에까지 묻은 때는 어찌할 것인가.
중도는 중립도 아니고 양비론도 아니지만, 중도의 실천 과정에선 거대 양당 체제의 ‘죄악’에 대해 중립과 양비론이 불가피할 경우가 많다. “중립과 양비론은 평소엔 바람직한 덕목일 수 있지만, 계엄에 대해서만큼은 안 된다”는 단서라도 달아주었으면 좋겠건만, 그런 배려는 전혀 없이 중립과 양비론에 대해 일방적인 폭격을 퍼부어댔으니, 개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아니 어쩌면 비판자들이 평소 다른 일에서도 중립과 양비론을 못마땅하게 여긴 강성파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말이야 바른말이지만, 한국은 오래전부터 과격이나 극단에 친화적인 사회였다. 20년 전 미국 정치학자 캐서린 문은 ‘한국 민주주의의 열정과 과잉’이라는 글에서 “그저 어떤 교회 안으로 들어가 큰 목소리로 ‘아멘’을 외치는 기도자의 열정을 보라. 신의 입장에서도 한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런 목회자를 보고 듣기란 어려울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열정은 결코 홀로 거주하는 법이 없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과잉과 짝을 이루어 함께 거주한다. 열정과 과잉은 한국 사회에 무성하다. 그러나 정치적 과잉이 증대하게 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번영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 열정적 신념은 타인의 신념과 의견에 대한 멸시로 돌변했고, 건전한 회의주의보다는 냉소주의가 한국 민주주의를 지배하고 있다.”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재명의 집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외쳐댄다. 정치보복의 가능성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는 몰라도 실제로 그런 극단적인 열정에 사로잡힌 이들이 많다.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국민의힘과 보수를 죽이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누구 안 되게 하는 역할에 표를 주라니, 이게 웬 말인가? 누구 안 되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탄핵 반대를 외쳤다가 얻은 게 무엇인가?
계엄을 탄핵으로 응징한 걸 비난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험천만한 이재명 세력에게 맡길 수 없다”고 주장하면, 어이없어하는 유권자들이 많지 않을까? 이재명 세력이 계엄보다 더 흉악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해줘야 알아들을 게 아닌가 말이다. 민주당보다 나은 정치상품을 보여줄 게 없다는 건가? 정말 궁금하다. “우리는 내세울 게 전혀 없다”는 겸손에서 그런 건가, 아니면 자해를 넘어선 자학에 중독되었기 때문인가?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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