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분야를 좋아해 정신없이 빠져드는 것을 속어로 '덕질'이라고 한다. 대상은 게임 음악 운동 등 특정 분야나 특정인, 특정 작품이 될 수 있다.
2022년 설립된 쿠키플레이스는 덕질을 사업으로 만든 이색 신생기업(스타트업)이다. 골수 팬이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상상을 상품으로 만들어 준다. 이렇게 만든 상품은 주문한 팬만 갖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덕질의 상징이 된다. 서울 홍익대 근처 와우산로의 쿠키플레이스 사무실에서 남선우(29), 장동현(34) 공동대표를 만나 특이한 기업사를 들어 봤다.
남선우(오른쪽), 장동현 쿠키플레이스 공동대표가 서울 마포구 쿠키플레이스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하며 덕질의 상징이 된 '크레페' 서비스를 소개하고 있다. 팬들은 크레페를 통해 다양한 상품 제작을 창작자들에게 의뢰한다. 정다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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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 블러드' 출신과 록마니아의 만남
한때 쿠키플레이스는 세상에서 사라질 뻔했다. 창업자를 둘러싼 배임과 횡령, 직원들에 대한 갑질 논란이 일면서 사업이 좌초했고 구성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지켜보던 투자자들은 기업 회생을 위해 2023년 장 대표를 해결사로 투입했다. "회사에 합류해 보니 창업자는 출근도 하지 않으면서 메신저로 직원들을 괴롭히고 이간질만 했어요. 결국 창업자는 지분을 내놓으면서 법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합의해 회사를 떠났죠."
그런 상황에서 회사는 사원이었던 남 대표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세 번째 입사자였던 남 대표는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퇴사를 결심했다. 그때 장 대표가 붙잡았다. "회사 일에 진심이었던 남 대표가 없으면 무너질 것 같았어요."
남 대표는 직원이기 이전에 덕질에 빠진 덕후라고 스스로 소개했다. 덕후란 특정 분야를 광적으로 탐닉하는 마니아를 뜻하는 일본말 '오타쿠'의 우리 식 변형 표현이다. 한영외고를 나와 홍익대 예술학과를 졸업한 그는 리안갤러리에서 전시를 맡는 큐레이터로 일하다가 덕질을 찾아 쿠키플레이스에 합류했다. "저는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등 연예기획사 SM의 아이돌 팬을 뜻하는 '핑크 블러드'예요. 여기에 애니메이션 '디지몬'과 게임 없이 못 살 정도로 게임을 좋아하죠. 그만큼 덕질 문화를 잘 알아 회사를 떠나지 못했죠."
두 명의 마니아는 서로 알아보고 의기투합했다. 남 대표가 서비스 운영과 기획을 총괄하고 장 대표는 경영과 기술 개발을 맡아 극적으로 회사를 살려냈다.
덕질의 상징된 크레페
이들이 만든 '크레페'는 덕질의 상징 같은 서비스다. 남 대표에 따르면 크레페는 팬이 원하는 상품의 기획안을 올려놓으면 창작자들이 만들어주는 온라인 창작물 중개 서비스다. “컵, 옷 등 각종 물건부터 글, 그림, 영상, 음악 등 다양한 콘텐츠로 만들어 줘요. 이렇게 주문 제작한 상품은 대부분 간직해요. 그만큼 덕후가 아니면 의뢰를 하지 않죠."
기존 작품이나 인물을 대상으로 한 상품도 있지만 아예 의뢰자가 이야기를 만들어낸 상품도 있다. "머릿속 상상을 눈에 보이는 실체로 만들어 줘요. 이렇게 스스로 창작한 작품을 의뢰하는 경우가 전체 의뢰 건수의 92%를 차지해요."
이용 방법은 간단하다. 의뢰 게시판에 원하는 상품의 기획안을 올리면 이를 보고 지원한 창작자들 가운데 선택해 의뢰하는 방식이다. 또는 크레페에 개설된 창작자들의 미니 홈페이지를 보고 선택해 의뢰해도 된다. "얼굴만 그리는 경우, 배경에 채색까지 하는 경우 등 세분화된 의뢰 형태에 따라 가격을 결정해요."
이 과정에 장 대표는 안전결제인 애스크로 시스템을 도입해 사고를 막았다. "크레페 등장 이전에는 창작자가 돈만 받고 달아나는 경우가 빈번했어요. 이런 경우를 사기 대출에 빗대어 '커미션론'이라고 해요. 이를 막기 위해 의뢰자가 결과에 만족해 송금을 결정할 때까지 의뢰비를 크레페에서 보관해요. 결과에 불만이면 창작자와 소통해 수정하고 단가를 다시 조정하죠. 이를 통해 커미션론을 없앴죠."
남선우(오른쪽), 장동현 쿠키플레이스 공동대표가 직원들의 휴식을 위해 사무실 한쪽에 마련한 놀이방에서 마작 게임을 하고 있다. 직원들 또한 마니아가 많아 게임, 만화책 등 다양한 콘텐츠를 갖추고 있다. 정다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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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수출까지 하며 반전 드라마를 쓰다
직원이 17명인 쿠키플레이스의 매출은 창작자에게서 받는 거래 수수료다. 장 대표는 "건당 10% 수수료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이를 통해 사라질 뻔했던 회사는 지난해 23억 원 매출을 올리며 올해 흑자 반전을 노릴 정도로 극적인 성장을 했다. 투자는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 등에서 누적으로 20억 원을 받았다. "올해 약 50억 원 매출을 바라봐요."
해외 매출도 전체 매출의 7%를 차지한다. 남 대표는 "외국인들이 페이팔로 결제한다"고 소개했다. "영문 서비스를 하지 않는데도 외국인들이 구글 번역을 통해 의뢰해요. 레딧,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해외 이용자들끼리 크레페를 알리면서 미국,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에서 많이 이용해요."
그래서 남 대표는 올해 해외 서비스를 본격 확대한다. "영문 홈페이지와 앱을 만들고 있어요. 해외 창작자들도 합류하고 싶어 하는데 우선 국내 창작자 지원에 집중할 생각이에요. 해외 이용자들이 크레페를 찾는 이유는 한국 창작자들을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봐요."
관건은 저작권이다. 유명 콘텐츠 제작사들은 상품으로 팔지 않아도 저작물 보호를 위해 팬들의 2차 창작, 즉 가공 행위를 막는다. 이에 대해 장 대표는 "저작권이 애매한 회색지대가 분명 존재한다"고 말했다. "콘텐츠 산업이 발전하려면 비상업적 용도에 국한해 팬들의 2차 창작 행위를 용인해야죠. K팝은 팬들의 2차 창작 행위를 인정하는 분위기예요. 앞으로 저작권 때문에 이용자들이 곤란한 상황을 겪지 않도록 해결 방안을 계속 고민해야죠."
최연진 IT전문기자 wolfpac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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