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정치부 기자로서 가장 비참했던 순간을 말하라면 3월 27일을 꼽겠다. 그날 서울 광화문 앞에 쪼그려 앉아 '윤석열·김건희 100대 비리'를 검증하겠다는 더불어민주당의 엄포를 기계처럼 받아 써 내렸다. 최악의 대형산불로 누군가의 터전, 크고 작은 생명이 불타 잿가루가 되어가던 때였다.
"화마에 사람이 죽었는데…." 싶으면서도 목구멍까지 올라온 질문들을 입 밖으로 내뱉진 못했다. 민주당 천막 당사를 왜 경남 산청 산불 현장이 아닌 광화문에 펼쳤냐고, 김 여사 논문 표절 의혹 보다 당장 몇 배는 더 시급한 일이 있지 않느냐고 따져 묻지 못했다.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반성의 의미로 국회에 계류 중인 산불 대책 법안을 쭉 훑어봤다. 산불 진화대원들의 진입로를 확충하고, 노후화된 산불 헬기를 교체하는 방안 등 국회 차원에서 논의해볼 만한 법안이 수두룩하다. 그럼에도 산청에서 시작된 산불이 전국 곳곳을 불태우고 꺼지기까지 국회는 단 한차례도 법안 심사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정치권을 가득 메운 건 '연쇄 탄핵', '승복 압박', '예비비 논란' 같은 서로를 메어치는 논쟁들이었다.
조기대선 국면에 접어들면서 정치권 한쪽에선 '정권을 빼앗길세라', 다른 한쪽에선 '권력을 되찾아오려고' 혈안이다. 그래서일까. 강동구에 지름 20m의 거대 싱크홀이 발생했는데도 두 거대 정당은 상대 수장을 강요죄로 고발한다거나 정권의 '알박기 인사' 의혹을 파헤치는 일에 집중했다. 미래세대를 위한 기후특위 출범은 기약 없이 늦어지는데, 173페이지 분량의 '이재명 망언집'이나 윤 전 대통령·가족 의혹 100가지를 정리한 '비리 백서'는 뚝딱 잘도 만들어졌다.
[이투데이/김은재 기자 (silverash@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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