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갈등 상황에선 관세 협상 ‘필패’
국익 지킬 전략·협상 실력 보여줘야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국무총리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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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는 김대중 정부 시절 초대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일하던 2000년 관용차를 스웨덴의 사브(SAAB)로 바꿨다. 장관급 관료가 관용차로 국산차 대신 수입차를 선택한 것은 국민 정서를 고려할 때 이례적인 일이었다. 한국의 자동차 시장을 개방하라는 국제적 요구에, 통상 수장으로서 정부의 개방 노력을 알리겠다는 취지였다. 원래 스웨덴 기업이지만 당시 미국 GM의 자회사였던 사브 차량을 탄 것은 유럽과 미국 자동차업계를 모두 겨냥한 카드였다. 개방론자인 한덕수의 소신과 전략은 관용차의 디테일에까지 적용됐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주미대사로 부임한 그는 미 의회를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부정적이던 상·하원 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한 대사는 상원의원 100명, 하원의원 435명을 모두 만나 면담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 의회 관계자들이 “외국 대사가 미국 의원들을 만난 기록을 집계한다면 한 대사가 기네스북에 오를 것”이라고 농담할 정도였다. 그는 하루 8차례의 의원 면담 일정을 소화한 적도 있고, 의회가 문 닫은 휴회 기간에는 미국 57개 도시를 찾아 지역구에서 의원들을 만나 설득 작업을 벌였다. 결국 2011년 10월 한미 FTA는 미 의회의 비준을 받았다. 무역 장벽 철폐를 통한 경제 영토의 확장은 한덕수의 진심이었다.
한 권한대행을 빼고 한국 통상을 이야기하는 건 불가능하다. 김영삼 정부의 청와대 통상산업비서관을 시작으로, 통상산업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김대중 정부의 통상교섭본부장, 청와대 경제수석, 노무현 정부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 국무총리, 이명박 정부의 주미대사, 한국무역협회장을 거친 그는 누가 뭐래도 국내 최고의 통상전문가다. 화려한 이력 때문에 ‘처세의 달인’, ‘관운(官運)의 끝판왕’이라 비판받기도 하지만 실력이 없었다면 보수·진보 정권을 넘나들며 중용될 수 없었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DC에서 열린 공화당의회위원회(NRCC) 만찬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워싱턴DC=로이터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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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전쟁과 불법 계엄에 이은 대통령 탄핵으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임시 국정 운영을 통상전문가인 그가 맡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다.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의 시간’은 대선 전까지 2개월에 불과하지만 우리 경제의 사활이 걸린 골든타임이다.
무차별 관세 폭탄을 퍼붓고 있는 트럼프는 교역국과 본격 협상에 착수하면서 우선 협상 대상으로 한국·일본 등 동맹국을 지목한 상태다. 동맹국을 배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對)미 무역흑자가 큰 나라부터 본보기로 협상하려는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는 지난해 협상이 끝난 방위비 분담금마저 올리겠다며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한국의 정치 상황을 고려해 새 대통령 선출 때까지 트럼프가 기다려줄 분위기도 아니다.
증시와 환율, 성장률 등 경제지표가 최악이다. 한 권한대행은 트럼프의 막무가내식 관세 전쟁에 맞설 치밀한 전략과 실리를 챙길 최적의 협상 카드를 짜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건 어설픈 정치인의 모습이 아니라 통상전문가로서의 실력이다.
한준규 경제산업부문장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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