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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포커스] 1기 트럼프의 ‘관세 기출문제’ 풀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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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관세 전쟁 되짚어 보면

대응법에 대한 힌트 얻을 수 있어

트럼프와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여론에 휘둘리지 말고 인내해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일(현지시각)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차트를 들고 상호 관세 부과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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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험을 보든 가장 기본적인 준비는 기출문제를 찾아 풀어보는 것이다. 최고 득점은 모르겠지만, 평균 이상은 보장한다. 핵심 요점이 들어 있고, 출제 경향을 알 수 있다. 만약 출제자가 같다면? 고득점도 노려볼 만하다.

취임 80일 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내고 있는 ‘관세 문제’는 8년 전 1기 트럼프 때와 매우 흡사하다. 우방국을 가리지 않고 관세로 겁박하고, 중국을 상대로는 ‘관세 전쟁’을 선포한다. 철강·자동차 등 일자리와 밀접한 제조업을 1차 타깃으로 삼고, 개별 국가와 협상을 통해 최대한의 양보를 끌어낸다. 마지막에 협상을 마무리하며 결과야 어떻든 스스로 ‘승리’를 선언하는 초식이다.

상대국의 관세 맞대응, 관세 역풍으로 아이폰 등 주요 소비재 가격 상승, 기업인들과 월스트리트 투자자들의 비판 등 지금 보고 있는 일들이 8년 전에 똑같이 벌어졌다. 글로벌 기업들의 미국 투자를 압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연인지 몰라도, 2017년 1월 트럼프 취임 직전 미국 투자를 가장 먼저 발표한 국내 기업이 현대차였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차이가 있다면 8년 전엔 한국 돈으로 3조6000억원, 이번엔 31조원으로 9배가 됐다.

과거 트럼프 관세 전쟁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단기간에 끝나지 않는다. 트럼프는 2017년 1월 취임 직후 관세 전쟁을 선언했는데, 4년 임기가 거의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개별 국가와 상품을 대상으로 관세 줄다리기를 했다. 중국과 1차 관세 협상을 마무리한 것이 4년 임기 중 3년 가까이 지난 2019년 12월이었다.

그 사이 수시로 지식재산권 침해 조사 등 변칙적인 무역 공세를 날리며 상대를 압박하는 것도 트럼프 방식이다. 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재협상을 진행하는 중간에 세탁기·태양광 등에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며 몰아세웠다. 노회한 트럼프와의 관세 협상엔 인내심이 필요하다.

대중의 여론에 휘둘려서도 안 된다. 한국은 트럼프 1기 때 철강 협상에서 오답을 냈다. 트럼프는 한국 철강을 주요 관세 대상 품목으로 지목하며 53%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했다. FTA 위반을 지적하며 한국 내 여론이 들끓었다. 우리 정부는 관세를 면제받는 대신 수출 물량을 30% 감축하는 쿼터제(할당제)에 합의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관세 면제를 조기에 확정했다’며 성과를 과시했다. 1년 후 확인한 답안지의 채점 결과는 달랐다. 일본·중국·유럽연합(EU) 등은 관세를 부담하는 대신 물량을 지키고, ‘면제 대상 품목’ 등 예외 조항을 적극 활용했다. 문제를 고차원적으로 풀어나간 것이다. 미국 내 철강 생산을 단기간 늘리지 못하다 보니, 관세에도 불구, 미국의 철강 수입은 거의 줄지 않았다. 철강 가격이 오르면서 경쟁국들은 대미 철강 수출액이 오히려 늘거나, 줄어도 소폭 감소에 그쳤다. 반면 수출 물량을 줄인 한국의 대미 철강 수출액은 25% 감소했다.

1기 트럼프 때와 현재 상황의 다른 점도 있다. 1기 트럼프가 임기 막바지 관세 협상을 타결한 것은 재선을 앞두고 미국 내 여론의 눈치 때문이었다. 이번엔 재선이라는 변수가 없는 만큼, 그는 끝까지 관세 전쟁을 벌일 수 있다.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트럼프의 신념은 뼛속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상대하는 중국이 트럼프 1기 때보다 강력해졌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무역 전쟁’의 소용돌이도 당시보다 훨씬 거셀 것이다. 최근 중국·일본의 발 빠른 대응을 보면, 이들은 기출문제에 대한 학습을 끝낸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도 그랬을 거라 믿고 싶다.

[이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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