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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북한 무장공비로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다 귀순한 김신조 목사가 9일 별세했다. 83세. 서울성락교회 등에 따르면 김 목사는 이날 새벽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 목사는 42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18세부터 북한군 생활을 했다.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군 소속이던 68년 1월 21일 공작원 30명과 함께 서울 세검정 고개(자하문 고개)까지 침투했다. 청와대를 습격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하고, 남한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목표로 북한 개성에서 출발한 지 나흘 만이었다.
이들은 청와대를 300m 정도 남겨둔 상황에서 경찰 검문에 걸렸다. 청와대 진입 시도를 저지하기 위한 군경의 소탕작전이 벌어지자 공작원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쏘며 저항했다. 이때 벌어진 교전으로 서울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을 포함해 군경과 민간인 총 7명이 숨졌다. 공작원 31명 중 29명이 사살됐고, 1명은 월북, 유일한 생존자인 김 목사는 투항했다.
생포 이튿날 김 목사는 수갑을 찬 채 기자회견에 나섰다. 침투 목적을 묻자 거친 말투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답했다. 국민은 충격에 빠졌고, 진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김신조 부대와 비슷한 부대를 만들어 보복하라”고 지시했다. 최고 권력기관인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지휘 아래 68년 4월 ‘실미도 부대(684부대)’를 만들었다. 공작원 수는 김신조 부대와 같이 31명이었다. 이들에게 행해진 가혹한 대우가 실미도 사건을 불렀다. 1·21 사태를 계기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고, 육군3사관학교와 전투경찰대가 만들어졌다.
그는 68년 3월 전향을 결심했다. “나도 서울시민들이 평온한 표정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흔들렸다”고 했다. 70년 4월 주민등록증을 받았고, 자신을 편지로 위로해 주던 부인과 같은 해 10월 결혼했다. 아내의 전도로 신앙의 길에 들어선 그는 91년 2월 서울 침례신학대교를 졸업했다. 남한에 건너온 날을 기념해 97년 1월 21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그는 자전적 에세이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와 신앙 간증집 『날지 않는 기러기』에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기록해 남겼다.
서지원 기자 seo.jiwon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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