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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용의 물건만담] 150불짜리 열쇠고리에 매달린 전쟁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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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열쇠고리

서러운 우크라이나 국민 생각하다 ‘전쟁 굿즈’를 알게 됐다

러 수호이機 잔해로 만든 열쇠고리에 격추지점 좌표도 새겨

결제 페이팔·배송 페덱스… “기부·판매금은 재건 기금으로”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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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트럼프와 밴스에게 둘러싸여 망신을 당하던 날 내 안의 뭔가가 끓어올랐다. 국제 정세의 비정함처럼 형이상학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돈 없고 힘 없으면 서럽다는, 인류의 유서 깊고도 너저분한 진리를 한번 더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살면서 돈과 힘이 없었던 적이 더 많다. 국제 망신을 당하는 젤렌스키와 우크라이나인들이 남 일 같지 않았다. SNS에 허망한 탄식과 분노를 올리기보다 실질적인 일을 하기로 했다. 돈을 보태기로. 어떻게?

나는 몇 년 전 본 ‘드론스 포 우크라이나 펀드’ 홈페이지를 찾았다. 이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 격추된 전투기 기체로 열쇠고리를 만든다. 항공 애호가 수집품 중에는 퇴역 여객기 조각을 잘라 만든 열쇠고리가 있다. 각 항공사의 색이 보이는 금속 조각을 가공해 수집가에게 인기다. 이들은 그 열쇠고리의 디자인 방식대로 전투기 조각을 잘랐다. 러시아 수호이-34 전투기의 파란색 기체 조각에 격추 지점 좌표를 새겼다. 미화 1000달러 이상을 기부하면 기부의 증표로 열쇠고리를 보내준다.

그 단체는 여전했다. 심지어 열쇠고리 종류가 늘어났다. 수호이-34에 이어 폭격기와 전투용 헬리콥터로 만든 열쇠고리까지. 전쟁이 길어진 만큼 격추 기체가 늘었을 테니 소비자, 아니 기부자의 선택권이 늘어났다. 심지어 찾다 보니 이제는 더 많은 기업과 단체가 비슷한 방식으로 파손된 무기를 활용한 기념품을 만들고 있었다. 전쟁 굿즈를 만들어 판매하는 21세기 초고도 자본주의가 내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드론스 포 우크라이나 펀드’ 기부는 포기했다. 기부금 1000달러는 내 자금 사정엔 조금 비쌌다. 괜찮았다. 이미 선택지가 너무 많았다. 30달러짜리 열쇠고리부터 1500달러짜리 실제 전투기 잔해까지. 우크라이나 현지 업체부터 ETSY나 아마존 판매자까지.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유통처와 생산처에서 판매하는 우크라이나산 전쟁 기념품을 고를 수 있었다. 구경하는 내내 ‘이런 건가’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고민 끝에 나는 기부처를 정했다. 우크라이나군에 직접 기부하고 내역을 공개하는 ‘우크라이나 에이드 옵스’라는 단체가 있었다. 나는 2022년 격추된 수호이-34 RF81251의 잔해를 잘라 만든 열쇠고리를 택했다. 가격은 150달러.

상품 완성도가 더 높으면서 더 저렴한 것도 있었지만 그런 물건은 NGO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항공 애호가 기념품 가게에서 만들었다. 내 지출 목적과는 맞지 않았다. 구매와 배송은 일반 해외 직구와 똑같았다. 결재는 페이팔로, 배송은 페덱스로. 구매를 하자 며칠 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출발해 서울로 바로 왔다.

물건을 받고 이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나 자신을 소개하고, 칼럼 소재로 이 물건과 당신들 이야기를 적고 싶은데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되냐고 문의했다. 곧바로 승낙 대답이 와서 나도 질문을 정리해서 보냈다. 그런데 답변이 오지 않았다. 담당자가 다쳤나, 혹시 죽었나… 걱정하며 한번 더 문의 메일을 보냈다. 며칠 뒤 장문의 답장이 도착했다.

나와 메일을 주고받은 이는 자신을 암스테르담에 사는 은퇴 법조인이라 소개했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들을 돕기로 해 지금은 행정 업무를 맡아 내 질문에 답한다고 했다.

전 세계에서 기부가 들어오고 그중에는 나 같은 한국인도 있으며, 특히 퇴역 군인의 기부가 많다고 했다. 전쟁이 길어진 만큼 열쇠고리의 재료인 파손 기체는 얼마든지 있다고 했다.

기부금으로는 드론, 전파 방해 장치, 야간 투시경 등을 구입하고, 전쟁 고아나 재건 등의 자금으로도 쓴다고 했다. 그는 ‘푸틴은 자기 편한 대로 말을 바꾸는 습관이 있으므로 이 전쟁 범죄는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말로 메일을 맺었다.

이 기막힌 물건이 지금 내 열쇠고리에 매달려 있다. 2022년 3월 1일 러시아에서 출격해 우크라이나 키이우 근교 보로디안카 상공에서 격추되어 가공 과정을 거친 뒤 바르샤바를 거쳐 서울에 사는 내게 2025년 3월에 왔다. 전쟁 한 조각이 내 호주머니 안에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물건의 감촉이 한층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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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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