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스님 구리 신행선원장 |
인간은 많은 믿음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 믿음은 자신에 대한 믿음, 사람과 세상에 대한 믿음 등 많고 다양하다. 당장 지구와 우주가 멸망할 것 같지는 않다는 믿음, 학교와 직장 등 소속된 조직에 대한 믿음, 어떤 법칙에 대한 믿음, 신앙적 믿음, 가족과 동료에 대한 믿음, 국가와 사회에 대한 믿음 등 우리가 의식적으로 믿는 것 외에 경험에 의한 암묵적 믿음 등 헤아릴 수 없다. 그 믿음이라는 것이 사소한 것들이면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그 믿음의 규모가 커질 때 많은 문제가 야기된다.
종교에 대한 믿음을 지나치게 강요하다 보니 그 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에서 어긋나 본말이 전도된 성전(聖戰)까지 벌인다. 과연 어떤 전쟁이 성스러울 수 있나. 여성과 아이들도 죽고 노인과 젊은이도 죽었다. 아랍의 급진적인 테러리스트들이 이른바 '지하드'라는 성전을 한다고 하지만 그 근원은 무슬림이 알라에게 다가가는 성스러운 수행을 지하드라 했고 그것을 전쟁에 끌어다 붙여 불특정 다수를 향해 테러를 벌인다. 그 전쟁 어디에도 성스러움은 없다. 이런 전쟁의 이면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이권을 감춘 경우가 많다. 작은 이익을 위해 명분을 덧씌우고 대중을 호도하고 죽음에 뛰어들게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들도 정치적 신념에 의해 극단적으로 대립한다. 그들은 어느 편이든 나름의 확신을 가졌다. 다행히도 분단국가인 특수한 환경으로 전쟁과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내전은 벌어지지 않지만 주장하는 바를 들어보면 차곡차곡 쌓은 서로에 대한 증오가 서로 조화하긴 쉽지 않아 보인다. 불교에선 확신을 경계한다. 내가 홍길동에게 말을 하지만 홍길동은 어떤 존재인가. 결국 그 홍길동은 내 방식으로 인지하고 분별한 내 안의 홍길동이지 본질의 홍길동이 아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홍길동에게 말하는 것이다. 실제 홍길동은 어떤 나의 말을 듣고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와 홍길동이 생각하는 나는 결코 같을 수 없다. 누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가 누구의 말을 듣고 있는가.
확신은 위험하다. 그것이 다수 대중의 확신이면 그것은 곳곳에서 충돌과 마찰을 야기한다. 수행이 필요한 사람은 주장이 강하고 자기 확신이 뚜렷하다. 하지만 수행이 무르익은 사람은 주장이 부드럽고 그 무엇도 확언하지 않는다. 물론 모두가 과정이라는 길 위애 서 있는 것이다. 종교든 이념이든 그 어떤 확신이라도 결국 인연에 따라 변질되고 희석되며 근본을 잃고 허공에 흩어지기 마련이다. 지나친 확신은 시일이 지났을 때 그때는 왜 그랬을까 하며 온몸에 전기고문이 가해지듯 소름 돋거나 자다 이불킥을 하게 된다. 부끄러움에 혼자 얼굴을 붉힐 수도 있다. 인간은 삶 속에서 많은 경험을 통해 성숙되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것이 나이를 먹을수록 나름의 확신으로 고집을 부리는 경우가 많다.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할 때도 확신을 갖고 사이비종교를 믿을 때도 확신을 갖는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이들도 나름 확신이 있으며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이 허구라고 믿는 이도 많다. 주위 사람이 그것을 부정할수록 그들의 확신은 더욱 비상해진다. 확증편향은 그렇게 일어난다. 원하는 것만 보고 원하지 않는 이야기는 가짜뉴스로 손쉽게 매도된다. 확신에 눈이 멀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정의롭다.
스님들이 대중생활을 하는 공간을 큰방, 혹은 대방이라고 칭한다. 그 대방에서 공양을 하고 정보도 공유한다. 한때 승가대학에서 통학해서 소식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거나 뒤늦게 전달받아 불편을 겪는 경우가 곧잘 있었다. 그래서 큰방 생활을 하는 도반에게 불만을 토로하니 그 도반이 "스님 그러니까 대방생활을 해야지!" 하며 면박을 주길래 우스갯소리로 받아쳤다. "스님은 도대체 그 대방이라는 작은 방에서 언제 나올 거요."
우리는 내가 정의하는 세상이 정상적이며 정의롭다고 믿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고집할수록 세상은 좁아지고 불만도 많아진다. 무엇이 중요한가. 세상에 평안을, 마음에 자비를.
혜원스님 구리 신행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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