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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청 어선원' 재해보상 막히나…"소음 측정해 오라"는 수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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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청 시달리는 어선원 재해보상 지침 돌연 개정

선원 개개인에게 '작업환경측정' 결과 제출 요구

선원들 "측정 사실상 불가능…수협이 선원 바보 취급"

수협중앙회 "법적으로 선원에게 입증 책임 있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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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선원들의 재해 보상을 책임지는 수협중앙회에서 소음성 난청으로 고통받는 어선원들에게 직접 선박 소음을 측정해 제출하라며 지침을 바꿔 논란이 일고 있다.

수년째 보상 인정 여부를 기다리던 어선원들은 갑작스러운 지침 변경으로 보상받을 길이 가로막힐 처지에 놓이자 울분을 터뜨리고 있다.

"뭐라고? 이렇게 몇 번이나 다시 물어야 해. 내 목소리도 소리 지르는 것처럼 자꾸 커지는데, 귀가 잘 안 들려서…"

40여 년을 어선 기관실에서 근무한 기관장 권태한(65·남)씨는 공공장소에서 대화를 할 때마다 주변의 눈치를 살핀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여러 차례 되묻는데, 그 과정에서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권씨는 수십 년간 기관실 소음 밑에서 일을 하다가 난청이 생겼다. 일상생활에 불편이 점점 커지자 3년 전쯤 '수협중앙회 어선원 재해보상보험'을 통해 소음성 난청 재해 보상을 신청했다. 3년 가까이 아무런 소식이 없어 애타게 기다리던 권씨는 지난달 수협 안내에 따라 대학병원에서 1차 검진을 받았고, 드디어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역시 30여 년간 선박 기관실에서 근무해 온 기관장 정성우(66·남)씨도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대화에 어려움을 겪자 동료 선원이 알려준 소음성 난청 재해보상을 신청했다. 보상 신청을 위한 사전 검진에서 정씨는 중도난청에 해당하는 우측 50, 좌측 54db(데시벨)을 진단받았다. 난청 인정 기준(한쪽 귀 40db)을 훌쩍 넘지만, 정씨는 재해 보상을 신청한 지 2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1차 검진조차 받지 못했다.

수협중앙회.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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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런 두 사람을 포함한 선원들에게 어쩌면 난청 재해 보상을 못 받을 수도 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수협이 돌연 재해 보상을 위한 조건으로 '작업환경 측정 결과'를 필수 제출하도록 지침을 바꿨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신청한 '어선원 재해보상보험' 제도는 '어선원 및 어선 재해보상보험법에 따라 운용되는 정부 정책보험이다. 어선원 등이 어업활동과 관련해 부상, 질병, 신체장해 또는 사망 등의 재해를 당하였을 경우 이를 보상하는 제도다. 이 법에 따라 수협이 해양수산부로부터 보상 업무를 위임받아 담당하고 있다.

수협은 지난 7일 개정한 '소음성 난청 재해 보상 실무 지침'을 통해 모든 보상 신청자가 '작업환경 측정 결과'를 제출하도록 했다. '작업환경 측정'은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사업에서 발생하는 소음과 분진, 화학물질 등 유해인자에 근로자가 얼마나 노출되는지를 측정·평가하는 것으로, 법적 대상인 사업장은 정기적으로 측정을 실시해야 한다.

수협이 재해 보상을 위한 필수 서류로 이를 요구하자 어선원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작업환경 측정은 전문 자격이 있는 업체에 의뢰해야 하는 데다,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작업환경 측정을 어선원 개인이 선박에 대해 실시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어선에서 소음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선주 협조가 필수적인데, 실제 어업에 나선 상황을 가정해 정밀한 측정을 여러 차례 해야 해 불편이 큰 탓에 선원 개인이 이를 허락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관장 권태한씨는 "(재해 보상을) 신청한 지 3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실컷 기다리게 하고는 이제 와 갑자기 규칙을 바꿔버리면 어떡하나. 수협이 우리 선원들을 바보 취급하고 있다"며 "소음 측정을 개인이 직접 하는 것은 어려울뿐더러 자기 배에 소음 측정하도록 허락해 주는 선주가 어디 있겠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울분을 토했다.

선원들의 보상 신청을 대리하는 이재무 공인노무사는 "개인이 작업환경 측정을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고, 다른 기관에서 개인에게 이걸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사례는 결단코 들어본 적도 없다"라며 "상식적이지 않은 요구며, 이는 수협에서 어선원들에 사실상 재해 신청을 하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수협중앙회는 선원 개인이 해당 자료를 제출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재해 보상을 위한 구체적인 소음 측정 자료가 필요해 지침 변경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내놨다.

수협중앙회 관계자는 "기존에는 수협이 선박 11척에 대해 측정한 결과를 반영해 왔지만, 이를 전국 2만 척에 확대 적용하는 건 대표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며 "개인이 제출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건 인정하지만, 법적으로 선원에게 입증 책임이 있기 때문에 소음 측정 자료를 요구하는 것이다. 사업주나 수협이 측정해야 한다는 법적 근거도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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