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의 '사건'들이 켜켜이 쌓여 그 의미가 한 공간에 압축된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다.
여유 있는 주말, 월미도나 인천항에 왔다면 자유공원에 들러보는 건 어떨까.
천천히 걸으며 표지판을 기웃거려 보자.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지표다.
자유공원 전경 [사진/임헌정 기자] |
공원(公園)은 근대의 산물이다.
그 출발은 왕실과 귀족의 사냥터와 정원을 노동자 계급과 중산층에게 개방한 것이었다.
인천 자유공원에는 거창한 수식어가 붙는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자 가장 오래된 근대식 공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 '서양식'이나 '근대식'은 이해를 돕기 위해 붙였을 뿐이다. 공원(public park)이라는 단어에는 이미 서양과 근대가 포함돼 있다.
인천 자유공원의 19세기 말 모습. 개항 이후 인천에 조계지를 만든 열강은 각국공동조계의 중간 지점에 각국공원(만국공원)을 조성했다. [인천시립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19세기 말 열강에 의해 강요된 근대를 맞이한 한국으로선 공원 조성이 자발적일 수 없었다. 자연히 공원은 탄생부터 비극의 한국사와 궤를 같이한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과 1883년 인천 개항으로 미국, 러시아, 영국, 일본, 청나라 등이 인천 땅에 조계지(외국인이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리도록 설정한 구역)를 뒀고, 이때 거주하던 외국인들은 각국공동조계의 중간 지점에 공원을 만들자고 합의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바로 각국공원(만국공원)이다. 1888년에 조성됐으니 서울 탑골공원(1897년)보다 9년이 빠르다.
서공원 전경. 일제강점기에 자유공원은 일본공원(동공원)의 서쪽에 있다는 이유로 서공원으로 불렸다. [인천시립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그러던 각국공원이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공원(동공원)의 서쪽에 있다는 이유로 '서공원'으로 불렸고, 해방 이후에는 다시 만국공원으로 불리다가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며 1957년부터는 지금의 자유공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탄생부터 명칭 변화까지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것이 바로 이 공원이다.
◇ 한성임시정부
국내에선 변호사로 활동하던 홍진(1877∼1946)이 각계 인사들을 끌어들여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석정루와 자유공원 전경 [사진/임헌정 기자] |
이들은 정부 조직안을 마련한 뒤 4월 2일 13도 대표자회의를 소집했는데 당시 회의가 열린 곳이 바로 인천 만국공원이었다.
지사들은 만국공원이 가진 상징성을 이용해 '만국의 장(場)'에서 세계를 향해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고자 했다.
당시 항일 지하신문인 '독립신보'는 4월 10일 한성임시정부 초대 내각 명단을 실은 호외를 발행했고, AP 통신은 이를 전 세계에 타전하기도 했다.
국내외 임시정부는 이후 통합 논의를 시작했고, 4월 13일 상하이, 노령(블라디보스토크), 한성 등 세 정부를 통합해 중국 상하이에 본부를 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다.
통합된 임시정부는 한성정부를 계승하기로 했고, 이는 만국공원에서 열린 대표자회의를 거친 한성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한 것이었다.
맥아더 동상 [사진/임헌정 기자] |
◇ 랜드마크, 맥아더 동상
자유공원은 인천 중구 송학동 일대의 해발 69m의 야트막한 응봉산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자유공원에서 가장 큰 조형물은 한미수교100주년 기념탑이지만, 랜드마크는 역시 맥아더 장군 동상이다.
이는 자유공원이라는 이름과 가장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다.
봄기운이 완연한 3월의 아침. 맥아더 동상은 강렬한 햇빛을 등에 지고 우뚝 서 있다. 역광으로 바라보니 그림자처럼 보인다.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지만, 남서쪽 제물포구락부 쪽에서 올라오는 계단에서도, 반대편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 쪽에서도 동상은 잘 보인다.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탑 [사진/임헌정 기자] |
맥아더 동상에서 북서쪽으로 중앙 광장을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1982년에 설치된 한미수교100주년 기념탑이 나온다.
역산해서 한국이 미국과 수교한 해가 1882년이라는 사실을 각인했다.
8개의 뾰족한 금속 구조물이 있고 그 아래 최만린 작가의 '움직임: 그 100년'이라는 청동 조각 작품이 놓여 있다. 탑의 명문은 시인 박두진이 썼다고 한다. 자유공원에서 가장 세련된 조형물이다.
◇ 석정루와 연오정
기념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석정루(石汀樓)와 연오정(然吾亭)이 있다.
2층으로 된 팔각형 정자인 석정루는 이 공원에서 가장 전망 좋은 곳이다. 1966년 30년간 자유공원을 산책한 사업가 이후선 씨가 누각을 지어 기증했다.
인천 앞바다와 월미산, 항구 전경이 펼쳐지는데, 미세먼지에 안개까지 낀 하늘은 아쉽게도 절반의 조망만을 허락했다.
석정루 [사진/임헌정 기자] |
연오정은 석정루보다 6년 앞선 1960년에 지어진 육각형 정자다.
연오정 자리는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회의가 열렸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로 앞에 이에 대한 표지석이나 안내판은 없다.
연오정에서 광장 쪽으로 조금 내려오니 길가에 소나무 한 그루와 그 밑에 2020년에 설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 헌수비'라는 작은 표지석이 있다.
이 자리에서 회의가 열렸다는 의미인지 표지석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자유공원에는 각국공원과 서공원 시절, 지금은 없는 화려한 근대 건축물들이 여럿 있었다.
영국인 사업가 제임스 존스턴의 여름별장, 1880년대 우리나라에 진출한 독일계 회사 세창양행의 사택, 청나라 외교관이던 오례당의 저택 등으로, 아쉽게도 모두 한국전쟁 이후 소실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 헌수비 [사진/임헌정 기자] |
자유공원을 걷다 보면 연륜이 느껴지는 큰 키의 수목들과 조우하게 된다.
은행나무, 양버즘나무, 팽나무, 산뽕나무, 느티나무 등 다양한 수종을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 광장 서쪽 난간 밑에 우뚝 선 양버즘나무는 그 웅장함에 놀라게 된다.
1884년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니 자유공원보다 4년 먼저 태어났다. 건물은 사라졌어도 나무는 살아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 청나라와 일본의 경계
자유공원은 공원 주변도 놓치면 안 된다.
응봉산 남쪽에 산줄기를 뚫어 만든 홍예문은 1908년에 건설된 시유형문화재다.
당시 인천 항구와 한국인촌의 경계로, 일본인들이 지계(地界)를 확장하기 위해 만들었다. 지금은 인천을 상징할 만한 대표적인 축조물 중 하나다.
아치형 문 위로 높게 쌓은 낡은 외벽이 한 세기를 훌쩍 넘긴 세월을 실감케 한다.
인천시유형문화재인 홍예문. 1908년에 건축됐다. [사진/임헌정 기자] |
자유공원 남서쪽 언덕 밑에 자리한 옛 제물포구락부는 개항기 제물포에 거주하던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외국인들의 사교장으로, 1901년 서양식으로 지어진 지상 2층의 아담한 집이다.
원래 명칭은 제물포클럽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클럽'의 일본식 가차음인 '구락부'로 불린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는 스토리텔링 박물관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건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이다.
청나라와 일본 조계의 경계가 된 이 돌계단은 급경사에 계단참을 두고 양쪽에 석등이 줄지어 있는데 왼쪽은 청나라식 석등, 오른쪽은 일본식 석등이다.
이 계단과 석등을 가운데 두고 왼쪽에는 차이나타운이 있고, 오른쪽에는 일본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19세기 말 인천의 조계지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상상해 볼 수 있는 특이한 공간이다. 이 계단 인근에는 2018년 복원된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대불호텔도 있다.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계단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중국식 건축물이, 오른쪽에는 일본식 건축물이 있다. 계단 좌우로 늘어선 석등도 왼쪽은 청나라식, 오른쪽은 일본식이다. [사진/임헌정 기자] |
◇ 자유와 독립
차이나타운에서 여유롭게 점심을 먹고 빠뜨린 게 있는지 확인차 다시 공원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광장 옆 한구석에서 또 하나의 임시정부 관련 표지석을 발견했다.
'한성임시정부 수립 13도 대표자회의 집결지'라는 이름인데, 내용은 연오정 근처에 있던 헌수비와 대동소이했다.
도대체 대표자들이 모여 회의를 연 장소는 어디인가. 이 표지석은 바로 이 자리가 회의 장소라는 뜻인지, 자유공원 안에서 회의가 열렸다는 뜻인지 모호했다.
공원의 랜드마크인 맥아더 동상과 비교하면 임시정부와 관련된 안내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정확한 장소 표지도 없고 눈에도 잘 띄지 않았다.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 중 이곳에서 독립을 위한 중요한 이벤트가 열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진정한 '자유'란 뭘까. 누구를 위한 자유여야 하는가. 자유공원의 의미를 곱씹다가 갑자기 '독립'이 머릿속에 끼어들었다.
독립이 없으면 자유도 없음이 자명한 데 아무리 자유공원이라고 해도 이곳에선 독립이 단칸방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성임시정부 수립 13도 대표자회의 집결지 표지석 [사진/임헌정 기자] |
※ 참고 자료
1. 단행본 '모던걸 모던보이의 근대공원 산책'(김해경,2020)
2. '역사공원으로서 '인천 자유공원'의 가치와 발전방향에 관한 연구'(김시인, 2010)
3. '인천 자유공원의 역사적 변천과 역사도시공원으로서의 유산 가치 해석'(김순기, 2023)
4. '자유공원과 한성임시정부: '상해임시정부' 씨앗 뿌려진 만국공원'(유동현, 2018)
5. 인천광역시 중구청 홈페이지(https://www.icjg.go.kr/tour/cttu0101a06)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5년 4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fait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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