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공공지출을 싹둑 도려내 재정적자 사슬을 끊어내는 데 성공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이제 그의 전기톱이 관세와 무역규제를 향하고 있는데요. 아르헨티나는 100년 가까이 이어진 ‘관세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알려주고 싶은 아르헨티나 무역 자유화 정책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지난 2월 미국을 방문한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에게 선물할 전기톱을 들어 보이고 있다. 그는 대선 후보 시절 ‘병폐를 도려내겠다’며 전기톱 퍼포먼스를 벌였고, 이후 전기톱이 그의 상징이 됐다. AP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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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토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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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아르헨티나 시장에 선보일 수입 신차들입니다. 지난달 자동차 수입업체와 제조사들은 앞다퉈 소형 전기차·하이브리드차를 수입해 들여오겠다고 정부에 신청했죠.
‘100% 아르헨티나산’임을 내세우는 소형 전기차 티토. 티토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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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에도 국산 전기차가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기업 코라디르(Coradir)가 2022년 출시한 ‘티토(Tito)’이죠. 작고 귀여운 ‘도시형 전기차’ 티토는 성능도 참 소박합니다. 최고 속도가 시속 65㎞밖에 되지 않고요. 배터리를 100% 충전하면 고작 100㎞를 달릴 수 있습니다. 티토의 최소 판매가격은 1763만 페소(약 2346만원)인데요.
수입 전기차 관세 폐지로 티토가 직격탄을 맞게 되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하죠. 코라디르 CEO 후안 마누엘 바레토는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전기차 산업엔 인센티브가 필요해요. 완전히 개방된 시장에선 아르헨티나산 자동차 산업이 사라지고 수입산만 남을 겁니다.”
세금 깎고 수입문 활짝
이 정부 들어 관세가 내려간 건 전기차만이 아닙니다. 지난해 10월 아르헨티나 정부는 89개 품목에 대한 관세를 일제히 인하했습니다. 오토바이·타이어·커피·소형가전·가스통 등 생필품 관세가 대폭 낮아졌고요. 주요 산업용 원자재는 최대 35%이던 관세율이 최저 2%까지 뚝 떨어졌죠.
올 3월엔 수입 의류 관련 관세도 내렸습니다. 의류·신발은 35%→25%, 직물은 26%→18%로 관세율이 낮아졌죠.
아르헨티나는 수입만이 아니라 수출할 때도 관세를 내는 나라입니다. 특히 농산물 수출 관세가 높기로 유명한데요. 1월 말 이 수출세를 일부 인하하는 행정명령을 내렸죠. 대두 수출세는 33%에서 31%, 옥수수·밀은 12%에서 9.5%가 됐습니다.
세금만 깎아준 게 아닙니다. 너무 까다로워서 사실상 수입을 어렵게 만들었던 세관의 번잡한 신고·승인 절차를 대폭 없앴고요. 또 아르헨티나 국민이 해외에서 개인 용도로 주문할 수 있는 연간 한도를 세 배로(1000달러→3000달러) 높입니다. 이 중 첫 400달러까진 관세 면제 혜택도 주고요.
2010~2022년 각국의 평균 관세율 추이(단순 평균 기준). 관세율이 높기로 유명한 인도(10.1%, 분홍색 선)보다도 아르헨티나 관세율(11.9%, 맨 위 하늘색 선)이 더 높은 수준이다. 한국은 5.7%(초록선), 미국은 2.7%(맨 아래 파란색 선). 세계은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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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아르헨티나의 높았던 관세와 비관세 장벽이 하나둘씩 무너지고 있습니다. 자유시장경제 신봉자,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경제개혁인데요.
2023년 12월 취임한 밀레이 대통령이 공공지출을 무지막지하게 잘라내는 ‘전기톱 개혁’을 진행 중이란 소식을 전해드린 적 있죠(딥다이브 밀레이 경제실험 편). 이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여전히 극심하지만, 덕분에 아르헨티나는 16년 만에 재정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전 세계가 아르헨티나 경제가 달라졌다며 경탄했고요.
그런데 지난해 재정 흑자 달성에 성공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진 겁니다. 밀레이 정부가 무역 자유화로 한발짝 나아갈 수 있게 된 거죠. PAIS 세금 폐지, 각종 수입 관세 인하 정책을 펼쳤고요. 수출 관세는 당장 다 없애진 못하지만, 먼저 산업재(수출세 5%)부터 조만간 폐지한다는 계획입니다. 루이스 카푸토 경제부 장관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이 정부는 세금을 낮추기 위해 왔습니다.”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왼쪽)과 루이스 카푸토 경제부 장관. AP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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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론주의와 보호무역
사실 적절한 관세는 나라 경제에 도움이 됩니다.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무역 불균형 해소에도 일부 기여하니까요. 그래서 어느 정도의 관세 또는 비관세 장벽이야 대부분 나라에 있기 마련인데요.
하지만 아르헨티나 경우엔 그 정도가 너무 심했고, 기간도 너무 길었다는 게 문제입니다. 아르헨티나는 보호무역주의 역사는 1930년 미국 ‘스무트-홀리법’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됐는데요(딥다이브 스무트-홀리법 편 참고). 100년 가까운 그 역사에서 특히 눈에 띄는 두 전직 대통령이 있습니다. 후안 페론(1946~1955년, 1973~1974년 재임)과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2007~2015년 재임).
후안 페론 대통령과 그의 부인 에바 페론이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 동아일보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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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통했냐고요? 처음엔 반짝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요. 이내 한계에 부딪혔죠. 경쟁이 사라지자, 국내 산업에선 혁신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조잡한 구식 국산 제품은 쓸데없이 가격만 비싸졌고요. 수출시장에서 아르헨티나산 제품이 경쟁력을 잃으면서 무역적자가 불어납니다. 정부가 보조금을 쏟아부으며 산업을 떠받쳤지만, 이는 재정적자만 키웠고요. 아르헨티나 경제는 점점 수렁에 빠집니다.
아르헨티나 보호무역주의는 페론주의 계승자인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 시절 또다시 극에 달합니다. 관세만 높인 게 아니라 ‘수입 허가제’를 도입해 문을 걸어 잠갔죠. 특히 전자기기는 국내에서 제조돼야 한다며 사실상 수입을 불허했는데요. 이로 인해 애플 아이폰은 무려 8년 동안 아르헨티나 매장에서 사라졌고요.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암시장에서 미국 판매가의 3배를 주고 아이폰을 구해야 했습니다.
당시엔 외국기업이 아르헨티나에 수출한 만큼 아르헨티나 제품을 수입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었습니다. 수입차 업체는 이 나라에서 계속 영업하기 위해 와인·올리브(포르셰), 쌀(BMW), 땅콩(미쓰비시·현대차), 닭 사료(스바루) 재판매 사업에 뛰어들었고요. 그 사업 비용으로 인해 수입차 값은 거의 두 배로 치솟았고, 자동차 시장은 침체에 빠졌죠. 고립적인 보호무역주의의 당연한 결말입니다.
변화와 비판
현 대통령인 하비에르 밀레이는 자유무역을 지향합니다. 관세와 무역장벽이 아르헨티나 경제에 독이 됐다고 보기 때문이죠. “보호무역주의는 거짓말”이고 “수입품을 국내 생산으로 대체하는 건 재앙적”이라고 그는 비판하는데요. 지난달 의회에선 이렇게 말합니다.
“수십 년 동안 소수의 일자리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수백만 아르헨티나 국민의 생계비가 상승했습니다. 품질이 의심스러운 상품을 완전히 왜곡된 가격에 구매하도록 강요하기도 했습니다.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원하는 누구와든 거래할 자유를 돌려줘야 합니다.”
소비자들은 이제 변화를 체감합니다. 수입 규제가 풀리면서 많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미국 아마존에서 물건을 주문하기 시작했고요. 슈퍼마켓 진열대엔 이탈리아산 토마토소스, 스페인산 과자, 폴란드산 보드카 같은 이전엔 볼 수 없던 수입 제품이 빼곡합니다. 이 나라 수입업자 수십 명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에서 열리는 대규모 박람회를 돌아볼 계획이라고 하죠.
4월 9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노조원과 은퇴자 등이 밀레이 대통령의 긴축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AP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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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랫동안 국가의 보호 아래 있었던 기업들은 불안합니다. 지난달 밀레이 정부가 의류 관세를 내리자, 의류협회는 “관세 인하로 수천 개 일자리와 국내 기업이 파괴될 것”이란 강경한 성명을 발표했죠. 높은 세금, 경직된 노동시장 같은 다른 문제를 그대로 두고 관세만 내린다면 “산업적 자살이 될 것”이란 반발입니다. 현 정부 비판에 앞장서는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은 밀레이의 자유무역 정책을 향해 “우리를 다시 원자재만 착취당하는 식민지로 전락시키려 한다”고 쓴소리했고요.
하지만 ‘시장 근본주의자’ 밀레이 대통령이 이런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죠. 그는 이렇게 받아칩니다. “경쟁력 부족으로 일부 기업이 파산하더라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소비자 가격이 하락할 테니까요. 일자리가 줄어들어도 일시적 현상일 뿐입니다. 다른 기업이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안한 인플레이션
그럼 밀레이 정부의 자유무역을 향한 전진은 조만간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게 될까요? 국민은 전보다 먹고살기 좋아졌다며 결국 이를 지지하게 될까요. 글쎄요. 아직은 좀 더 두고 봐야 합니다.
일단 아르헨티나 인플레이션이 여전히 심상찮습니다. 3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이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월 3.7%(연간으로는 55.9%)를 기록한 건데요. 정부의 보조금 축소로 전기·가스 같은 공공요금이 일제히 오르는 추세이죠. 생각만큼 관세 인하 효과가 눈에 띄지 않게 될지 모릅니다.
아르헨티나의 월간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 3월 상승률이 예상보다 훨씬 높은 3.7%를 기록해 물가 불안이 되살아났다. 일시적 요인(사립학교 교육비 상승) 탓이 크다고 정부는 설명했지만, 물가가 잘 잡히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르헨티나 국립 통계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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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문제는 환율입니다. 밀레이 정부는 4월 14일을 기해 외환 통제 대부분을 없앴습니다. IMF로부터 200억 달러 대출을 승인받기 위한 조건인데요. 이로써 한 달에 200달러밖에 살 수 없었던 개인은 이제 제한 없이 마음대로 달러를 살 수 있게 됐습니다. 정부가 억지로 낮게 유지했던 환율도 이날부턴 일정 범위(1달러당 1000~1400페소)에서 시장 수급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게 됐고요. 즉, 환율의 고삐가 6년 만에 풀렸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르헨티나 경제를 신뢰하지 못하는 국민들이 가진 돈을 앞다퉈 미국 달러로 바꾸려 몰려든다면? 자칫 환율이 상한선까지 치솟을 위험, 당연히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세 인하 노력이 무색하게도 수입품 가격이 뛸 거고요.
외환시장 자유화는 아르헨티나 경제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정책이죠. 그래야 외국 자본이 ‘내 돈을 빼 나가지 못할 일은 없겠구나’라고 안심하고 투자하러 올 테니까요. 다만 그게 ‘물가 안정’이란 또 다른 중요한 목표를 위협할 수 있습니다. 밀레이 정부가 처한 딜레마인데요.
하긴, 병증이 깊었던 아르헨티나 경제를 치료하는 일이 쉬울 리 없습니다. 개혁이란 원래 어려운 일이죠.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폭탄까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 밀레이 대통령의 전기톱은 이 개혁을 끝마칠 때까지 배터리가 방전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By.딥다이브
밀레이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남다른 친분을 과시해 한층 유명해졌죠. 얼마 전 트럼프 대통령은 아르헨티나에 10% 상호관세를 매겼는데요. 밀레이 대통령 측은 “가장 낮은 관세”라며 위안했지만 국민들은 ‘친구라더니 이게 뭐냐’는 차가운 반응입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공공지출 톱질로 재정 흑자를 달성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아르헨티나 밀레이 대통령. 이제 그가 관세와 무역장벽 톱질에 나섰습니다. 각종 관세가 대폭 인하되고 수입을 막던 세관 절차가 사라집니다. 이제 다시 수입이 시작됩니다.
-페론주의의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으로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가장 무역장벽이 높은 나라 중 하나가 됐습니다. 고립적인 무역정책은 국내 산업을 키우긴커녕 경제를 망쳤죠. 관세에 중독된 국가 재정과 국내 산업이 무역 자유화로 나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밀레이의 관세 철폐 정책의 성공은 결국 물가 안정에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잠잠해지는 듯했던 인플레이션은 다시 들썩이고, 환율마저 걱정입니다. 아르헨티나는 지치지 않고 계속 개혁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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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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