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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고범준 기자 =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1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대국민 담화를 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2025.05.01. bjko@newsis.com /사진=고범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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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2년 노무현 대선을 꿈꾸는데 다른 사람들은 2007년 정동영 대선을 하는 것 같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
6·3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진영의 최대 화두는 '단일화'다. 국민의힘 주류를 중심으로 당 최종 후보와 한덕수 전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의 단일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어서다.
단일화는 매 대선 때마다 주요 변수로 꼽혔다. 특히 정치권에서는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와 2007년 정동영·문국현 단일화가 대표적인 단일화 성공, 실패 사례로 각각 기억된다.
KBS와의 특별회견(30일 녹화)에서 '바다이야기'와 관련한 노무현 대통령 대국민사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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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는 당 최종 후보로 선출됐음에도 당내 주류 세력이 주축이 된 '후보단일화협의회'로부터 정몽준 당시 국민통합21 후보와의 단일화 압박을 받았다. 정몽준 후보는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으로 꼽히며 인기몰이 중이었다.
결국 노무현 후보는 당 밖 인사인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에 응했다. 이후 과정은 빠르고 순탄했다. 룰을 두고도 양측이 크게 부딪히지 않았다.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는 단일화 룰에 합의한 지 8일 만에 여론조사를 통해 노무현 후보로 단일화했다.
그러나 정몽준 후보는 선거 전날 노무현 후보에 대한 단일화 지지 철회를 선언했다. 하지만 위기 의식을 느낀 진보 진영이 결집하면서 결국 '이회창 대세론'을 깨고 노무현 후보가 극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서울=뉴시스] 조성봉 기자= 정동영 한미의원연맹 공동회장이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박물관에서 열린 한미의원연맹 창립총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5.03.10. suncho21@newsis.com /사진=조성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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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대선 때는 전임 정부인 참여정부에 대한 비판이 거셌던 상황에서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당을 뛰쳐나와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했다. 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가 선출됐고, 이후 정동영 후보는 문국현 당시 창조한국당 후보와의 단일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단일화는 최종 무산됐다. 단일화 룰에 대한 이견이 컸고, 양측 1대 1 협상이 아니라 시민·사회세력까지 가세한 3자 간 협상 형태로 진행돼 혼란이 가중됐다. 결국 해당 대선에서 정동영 후보는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 참패했다.
[서울=뉴시스] 조성우 기자 = 제21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1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5.04.14. xconfind@newsis.com /사진=조성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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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전인 2022년 대선 때도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후보와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후보의 단일화가 있었다. 대선을 6일 앞두고 성사된 극적 단일화였다. 당시 단일화는 경선 없이 담판 형태로 이뤄졌으며 안철수 후보가 대선 후보에서 사퇴했다. 안철수 후보는 대신 윤석열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인수위를 공동 운영했다. 그 결과 윤석열 후보는 당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에 0.73%포인트 차이로 신승을 거뒀다.
안채원 기자 chae1@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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