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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3 (화)

    끝내 돌아오지 못한 5명 가슴에…노란리본의 약속은 4·16재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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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세월호를 실은 반잠수선 ‘화이트마린’호가 2017년 3월31일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포신항에 도착해 접안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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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3월31일 오후 1시께, 침몰 1080일 만에 반잠수정 화이트마린호에 실려서 목포신항에 도착한 세월호는 옆으로 누운 상태였다. 목포신항 부두에 거치된 세월호에 미수습자 수색을 위해서 선내로 진입하기 위한 통로를 만들었다. 누워 있는 배의 윗부분에서 사각의 구멍을 여러개 냈고, 선미 부분은 절단했다. 선내에 있던 화물차 등의 차량과 화물들, 배 안에 가득 차 있던 개흙을 빼냈다.



    선내에 있던 개흙은 ‘바스켓’에 담아서 세척대로 보냈다. 세척대에서는 작업자들이 고운 체 같은 것으로 혹여 유류품이나 유골들이 있지 않나 세심하게 살폈다. 세척을 마친 개흙들도 유가족들의 요구로 버리지 않고 긴 포대에 담아서 보관했다.



    그때까지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가 9명이었다. 그 가족들은 팽목항에서 목포신항으로 옮겨왔다. 그들은 낮에는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부스에 있었다. 그들은 미수습자 수색 과정에서 돌아오지 못한 가족의 유해가 나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그들 곁을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의 스님들이 지켰다. 실종자 수색이 종료되는 그해 11월까지 양한웅 사회노동위 집행위원장이 수고를 도맡아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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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가 목포신항에 입항한 가운데 2017년 4월2일 목포신항을 찾은 추모객들이 노란리본 등을 달며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목포신항 노란리본 소리 없는 아우성





    세월호 참사 가족들이 내려온 날부터 노란리본이 부두 출입구 쪽 철망 펜스에 매일 늘어갔다. 노란리본은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다. 목포시는 진도군보다 협조적이었다. 목포 시민들도 처음부터 적극적이었다. 목포 시민사회단체들은 ‘세월호잊지않기목포지역공동실천회의’를 구성해서 활동에 들어갔다. 천막과 컨테이너로 부스를 설치해서 찾아오는 피해자 가족들과 시민들을 맞았다. 수색작업이 진행되던 시기에는 매일 그곳을 지켜냈다. 세찬 바람과 땡볕 속에서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4·16연대)와 목포지역 단체들은 새로운 활동을 펼쳐냈다.



    영상팀도 가동되었다.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박종필 위원장과 그 후배들은 4·16티브이(TV)의 지성 아빠 문종택과 팀을 이루어 선체 수색 전 과정을 영상에 담았다. 그들은 가로누워 있는 선체를 기어가면서까지 선체 내부를 촬영했다. 그때의 작업이 너무 힘들었을까? 갑자기 박종필 감독이 현장에서 사라졌다. 소식도 끊어졌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고, 궁금증만 남았다.



    7월 중순의 어느 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 대표에게 전화가 왔다. “박종필 감독을 찾았어요.” 강릉의 한 요양병원에 있다고 했다. 다음날 그를 만나러 내려가면서 심호흡을 여러번 했다. 최악의 경우가 상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병상의 그는 갈비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말라 있었고, 온몸이 노란 물감을 뒤집어쓴 듯 노란색이었다. 황달기가 온몸에 퍼져 있었고, 병상에서 일어나 앉기도 힘들어했으며, 말도 하기 힘들어했다.



    병상을 지키던 후배들은 말도 제대로 못 할 거라고 했지만, 그는 내게 30분 동안 숨을 몰아쉬었다가는 다시 말을 이어가기를 반복했다. 간경화가 있었는데 너무 힘들어서 병원에서 진단을 받으니까 간암 말기였다고 했다.



    “세월호 가족들이 … 모르길 바랐어요. 세월호 일하다가 과로해서 … 그랬다면 안 되잖아요. 너무 미안해서요. 내가 너무 미안해요.”



    미안한 건 나인데, 그는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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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16일의약속국민연대’(4·16연대) 미디어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세월호 프로젝트 ‘망각과 기억’의 제작과 연출에 참여했고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미디어팀에서 촛불시위를 기록한 박종필 다큐멘터리 감독의 영결식이 2017년 7월3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리고 있다. 박 감독은 같은 달 28일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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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 기록 박종필 감독 별세





    “흔들릴 때 경석이 형과 래군이 형 보면서 흔들리지 말고 가자고 했어요…. 형 고마워요.”



    그는 세월호 가족들에게는 “늦게 오세요. 진상규명 다 하고, 책임자 처벌 다 한 다음에 천천히 오세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대학에서 미술 공부를 했는데, 졸업 뒤에는 카메라를 잡고 민중들 속으로 들어갔다. 노숙인, 장애인,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 속으로 들어가서 영상을 찍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은 모두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다.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일을 하면서는 다급하게 요청하는 행사 영상을 밤샘하면서 만들었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4·16연대 승합차를 타고 내려가는 길에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2017년 7월28일이었다. 그의 나이 49살이었다.



    그의 묘는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 초입에 있다. 묘비 전면에 ‘차별에 저항한 영상활동가 박종필의 묘’라고 쓰여 있는 석관묘다. 그즈음에 4·16연대 미디어위원회 1대 위원장이었던 ‘연분홍치마’의 김일란 감독은 위암 진단을 받아서 수술을 받아야 했다. 후배 활동가들이 잇단 암과 사망소식에 그해 여름은 너무도 괴로웠다. 내가 죄인인 것만 같았다. 피해자의 곁을 지키는 일은 몸과 마음을 갈아 넣는 일이 될 수가 있고, 병이 될 수 있다.



    그러는 중 문재인 정부가 5월10일 출범했다. 그즈음에 4·16재단을 만드는 작업을 재개했다. 2016년 하반기에 시작했다가 탄핵정국과 세월호 인양으로 잠시 중단했던 작업이었다.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의 다수 가족은 국가의 보상을 거부하고,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 승소했고, 그에 따른 배상금이 나오게 된 것을 계기로 재단 설립 작업을 시작했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재단 설립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2014년에 두개의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하나는 ‘4·16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4·16 세월호 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이었다. 후자의 특별법 제40조에 “4·16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고 대형 재난사고 재발 방지 등에 이바지하고자 설립되는 재단”에 국가가 출연 또는 보조할 수 있도록 했다. 4·16재단은 추모와 기억사업, 피해자 지원, 안전문화 확산 등의 사업을 하는 재단으로 특별법에 규정되어 있다. 이런 일을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엉뚱한 사람들이 재단을 만들어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갈까 봐 걱정되었다. 지금까지 세월호 참사의 모든 과정에 피해자가 중심이 되었고, 시민들이 함께했던 것처럼 재단도 피해자와 시민이 같이 만들고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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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이 2017년 11월16일 오후 세월호 선체가 놓인 전남 목포시 목포신항 부두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미수습자를 가슴에 묻고 18일 목포신항을 떠날 방침이라고 밝히고 있다.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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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가족·시민 함께한 4·16재단 출범





    전명선 당시 4·16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 등 집행부와 먼저 의논하였다. 경기도미술관 대강당에서 열리는 가족협의회 월례회의에 나가서 4·16재단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게 2016년 하반기였다. 그를 통해서 ‘재단설립 준비단’을 가족협의회와 4·16연대가 같이 만들었다. 민주노총의 한석호, 한신대의 김민환 교수 등은 단원고 유가족들을 반별로 만나면서 설득했다. 가족 중에는 성빈 엄마 김미현, 영석 아빠 오병환 등이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가족들은 생각보다 적극적이었다. 155가족들이 한가족당 500만원씩을 출연하기로 약정했다. 이런 사실을 알리고 시민 발기인도 모았다. 1만원을 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백만원 이상 출연하는 사람도 제법 많았다. 이렇게 해서 재단 출연금 10억원을 모았다. 재단 창립 때 정관 초안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김준우 변호사가 작성했고, 전문은 내가 썼다.



    2017년 11월16일, 인양된 세월호 수색작업에서도 유해를 찾지 못한 5명의 가족들은 목포신항에서 철수한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실종자 9명 중 일반인 승객 이영숙, 단원고 학생 조은화와 허다윤, 고창석 교사는 수색 과정에서 뼈 한쪽이라도 찾았지만, 단원고 학생 박영인과 남현철, 양승진 교사, 일반인 승객 권재근·권혁규 부자의 유해는 찾을 수 없었다. 유해를 찾은 가족들은 장례를 치른 다음이었다. 11월20일, 세월호 참사 1315일 만에 안산에서 유해를 찾지 못한 5명의 장례를 합동으로 치렀다. 그들의 유골함에는 소중한 유품들이 담겼다.



    2018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 4주기 뒤에는 정부합동분향소가 철거되었다. 5월10일에는 목포신항에 가로누워 있던 세월호를 바로 세웠다. 해저면의 갯벌에 묻혀 있던 세월호의 좌현 부분이 시뻘겋게 녹이 슨 모습이 드러났다. 5월12일 4·16재단이 국회에서 창립식을 가졌다. 선체조사위원회는 활동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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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6재단이 2018년 5월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창립대회를 열고 공식 출범했다. 초대 이사장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을 비롯해 국민발기인, 가족발기인, 416합창단, 평화의나무 합창단 등 참가자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4·16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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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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