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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 (수)

사기당한 집이 '내 집'이 됐다, 매일이 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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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법은 소용없었다
강제경매서 낙찰 어려운 깡통전세
헐값 감수하고 LH매입 실청하거나
피해자가 직접 낙찰받아 살 수밖에
"무자본 임대사업 못하도록 법 정비
보증보험 가입 확인 의무화되길"

편집자주

거듭 진화하는 전세사기는 단순히 제도의 한계로만 설명할 수 없다. 법과 제도의 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조직적 금융범죄에 피해자는 다시 일어설 기회조차 잃고 있다. 집을 삶의 터전이 아닌 빚의 족쇄로 만드는 이들, 그 범행 구조를 추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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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 피해자 김정현(가명)씨가 1일 본보와 인터뷰에 앞서 경기도 부천시 자택으로 향하고 있다. 강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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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는 청년의 제1 행동 원칙이다. 조금 더 나은 직장에 대한 기대, 조금 더 번듯한 집에 살아보고 싶은 기대, 성실하게 벌고 착실하게 쌓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마땅한 '우리 집'에서 살 수 있을 거란 기대. 김정현(가명·34)씨도 그에 따라 행동했다.

정현씨는 2021년 2월 더 나은 직장을 찾아 광주광역시를 떠나 서울로 터전을 옮겼다. 회사가 있는 강남 근처는 너무 비쌌고, 편도 1시간 이내 출퇴근할 수 있는 집을 찾다 보니, 부천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철을 한 번만 갈아타면 되고 급행도 정차하는 데다 부천역 근처에 오피스텔이 많았거든요."

부동산 앱으로 집을 둘러보고 중개사무소에 연락했다. 2019년 12월 신축되었다는 ㄷ오피스텔은 방 개수도 넉넉하고 무엇보다 깨끗했다. 스무 살 이후 전전했던 집들이 떠올랐다. 원룸을 반 쪼갠 기숙사, 바가지에 물을 담아 씻어야 했던 월세방, 벌레가 들이치던 3층집, 담배 냄새가 진동하던 사택까지. 전세보증금 3억200만 원이 고민됐지만, 중개인은 "낮은 금리로 대출이 가능하니 걱정 말라"고 했다. 결과적으론, 거짓말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몇 번이고 덫이라는 신호가 있었다. 전세계약서를 쓰는 당일 집주인이 황모씨에서 유모씨로 바뀌었다. 매매가는 3억200만 원으로 전세금과 같았다. 찜찜했지만, 당시엔 '깡통 전세'란 말이 흔하지 않았다. "부동산 호황기니까, 그 정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5년. 사기를 자각하고, 피해자 자격을 증명하고, 대출금을 갚을 방도를 찾고, 사기꾼들을 고소하고, 결국 경매로 피해 주택을 떠안았다. 동시에 몸과 마음은 갈려 나갔다.

2022년 '빌라왕' 사건을 계기로 전세사기특별법이 제정됐다. 정부로부터 주거, 금융, 법적 절차 등 전방위적 지원이 이뤄졌지만, 어떤 피해는 회복되지 않았다. 2025년 5월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전세사기 누적 피해는 2만9,540건이고 이 중 75%가 40세 미만 청년세대. 청년의 시간, 정현씨 또한 그중 한 명이 됐다. 공교롭게, 집을 중개한 사무소 이름은 '청춘 복덕방'이었다.

집을 빌려 살았다, 사기 사건의 피해자가 됐다


시작은 입주 1년 3개월 뒤인 2022년 6월 은행에서 온 한 통 전화였다. "부동산에 가압류가 걸렸는데 알고 계셨나요?"

등기부를 확인하니, 집은 세금 체납을 이유로 세무서에 가압류돼 있었다. 집주인은 "곧 정리하겠다"며 넘겼지만 한 달 간격으로 안산, 인천 등 세무서에서 잇따라 압류를 걸어왔다. 뉴스에서는 경기와 인천 곳곳에서 전세보증금 사고가 터지고 있단 보도가 쏟아졌다. '혹시 나도?' 불안감이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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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가명)씨의 전세사기 피해와 회복 과정. 그래픽=송정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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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예감은 대체로 빗나가지 않는다. 2023년 3월 전세 계약 만료일, 집주인은 연락이 두절됐다. 들어놓은 전세반환보증보험도 없었다. 가입을 알아봤지만, 이미 계약기간의 절반이 지나 요건이 안 됐다. 그나마 정현씨는 대항력을 가진 선순위 임차인. 법원을 통해 임차권등기명령과 지급명령을 신청했다. 보증금 반환 전까지 주택 인도를 거절할 수 있는 '대항력'과 경매 시 매각대금에서 보증금을 우선 돌려받을 수 있는 '우선변제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집주인 재산을 추적했다. 지급명령과 민사소송을 통해 계좌와 채권 압류를 시도했다. 하지만 계좌에 찍힌 잔액은 고작 '1만 원'. 본점에만 압류를 걸면 되는 1금융권과 달리, 2금융권은 지점들이 개별 법인인 탓에 일일이 압류를 걸어야 했다. 먼 지점에 계좌를 개설하면 사실상 찾아낼 방도가 없었다. 차선책으로 집과 자동차 가구 등에 압류를 시도했지만 그 역시 허탕이었다.

"법원 집행관, 열쇠공이랑 집을 찾아갔어요. 증인도 2명이 필요하다고 해서 염치 불고하고 직장 동료한테 같이 가달라고 부탁했죠. 문을 두드렸더니 여성 두 분이 나오시더라고요. 유xx(임대인)도, 김xx(중개인)도 모른대요. 여자분들 사는 집을 휘저을 수 없으니까…빈손으로 돌아왔죠. 집주인의 여동생이랑 어머니였더라고요."

난생처음 경찰서도 찾았다. 인천에 있는 경찰서에 집주인을 고소했는데, 연락이 온 건 경기 남부경찰청 반부패수사대였다. 피해자들이 많아 함께 수사하겠다는 전화였다.

경찰은 ㄷ오피스텔의 부동산 매매대금이 2억6,900만 원이었다고 알려줬다. '3억200만 원'으로 적힌 계약서는 중개사 직인이 찍히지 않은 허위 계약서였다. 남은 3,300만 원을 집주인과 중개인이 나눠 챙겼다. 매매대금보다 높은 전세금, 전형적인 '무자본 갭투자' 사기였다.

인천지검 부천지청은 집주인 유씨와 중개인 김씨를 사기와 불법 리베이트 혐의로 기소했고, 오는 20일 1심이 선고된다. 이들은 지난해 19명에게 피해금액 총 25억 원에 달하는 전세사기를 저지른 혐의로 징역 3년을 판결받고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검찰과 법원에 따르면 집주인 유씨가 매수한 집은 모두 668채에 달한다. 정현씨의 오피스텔 역시 이 중 하나다.

사기당한 집이 내 집이 됐다


정현씨처럼 전세 사기의 피해는 압류로도, 고소로도 회복되지 않는다. 남은 방법은 강제 경매를 통한 배당금으로 손실을 보전받는 것 정도다. 그러나 전세사기 피해주택은 입찰자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전세보증금이 집값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깡통 전세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임차인 보증금을 추가 부담할 낙찰자는 거의 없다.

선택지는 두 가지다. LH에 전세사기 피해주택 매입을 신청하거나 직접 집을 낙찰받는 것이다. 현저하게 낮은 낙찰가를 감수하고서라도 보증금의 일부를 돌려받는 대신 집에 대한 권리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언젠가는 집값이 올라 피해금액을 회복할 수 있을 거란 기대로 책임과 권리를 모두 떠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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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간 임차인이 직접 거주 주택을 낙찰 받은 건수 변화. 그래픽=송정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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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씨는 후자를 택했다. 한 차례 유찰은 있었지만, 2억4,000만 원에 낙찰을 받았다. 보증금 3억 200만 원에서 6,700만 원이 모자라는 돈이다. 여기에 오피스텔 취득세 1,200만 원이 추가됐다. 2025년 현재 ㄷ오피스텔의 기준시가는 1억9,000만 원이다.

인생이 잘 짜인 극본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희망을 주곤, 기다렸다는 듯 앗아간다. 2022년 2월, 10년 넘게 납입한 청약통장으로 아파트에 당첨이 됐다. 신혼 보금자리가 될 집이었다. 4개월 뒤인 6월, 오피스텔에 가압류가 걸렸다는 통보를 받았고 다시 두 달 뒤인 8월 갑상선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술을 받으며 소송, 압류, 경매의 과정을 헤쳐갔다. 생애 첫 아파트의 잔금이 되었어야 할 돈은 전세사기 피해주택을 떠안는 데 고스란히 쓰였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기로 했다. "갚아야 할 돈이 산더미인데... 결혼식은 사치처럼 느껴져서요."

전세나 월세 세입자를 받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은행이 설정한 근저당 때문이다. 정현씨는 앞서 서울보증보험(SGI) 보증을 통해 2억 원의 전세대출을 받았다. 2억 원은 피해 주택 낙찰에 쓰였다. 피해지원법에 따라 전세피해자들은 대출금을 20년간 무이자로 분할상환할 수 있는데, SGI는 대출금 회수를 위해 은행에 근저당 설정을 요청했다.

오피스텔은 이제 버릴 수도, 살 수도, 그렇다고 세입자를 들일 수도 없는 수렁과 같은 집이다. 겨울철 깨진 타일을 수리하는 데 200만 원이 들었는데 '내 집도 아닌데 쓰는 돈'이란 생각부터 들었다. "그래도 집이 생겼다고요? 평생 발이 묶였다고 생각해보세요. 돌려받았어야 할 돈을 20년에 걸쳐 대신 갚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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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가명)씨는 2022년 10년간 납입한 청약통장으로 신혼 보금자리가 될 아파트 청약에 당첨됐다. 그러나 생애 첫 아파트 잔금이 되었어야 할 목돈은 전세사기 피해주택을 떠안는 데 쓰였다. 지난 1일 정현씨가 부천시 오피스텔 건물에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강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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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의 밤...그는 여전히 그곳에 산다


정현씨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불면증약과 항우울제약으로 버텼다. 낮에는 법원과 경매 업무를 보고 밤에는 야근을 했다. 불면의 밤엔 '고통이 끝나긴 할까' 하는 의심과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하는 후회가 엄습했다. 기준시가를 미리 살펴볼걸, 계약서를 꼼꼼히 볼걸, 보증보험을 미리 들어둘걸, 다른 전세대출을 이용할걸, 실은 '애초에 그 집에 들어가지 말걸' 하는 후회가 모든 것에 우선했다.

5월 초 부천역 근처에서 만난 정현씨는 "긴 싸움에서 얼마쯤 온 것 같냐"는 물음에 "절반, 아직 절반"이라고 했다. 다만 과거는 수정할 수 없지만 미래는 수정할 수 있다. "자기자본 없이는 임대 사업을 할 수 없도록 법이 정비되면 좋겠어요. 보증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집이라는 사실을 계약서 작성 전에 의무적으로 확인해주면 좋겠어요."

'전세'라는 위태로운 시스템과 교묘한 사기꾼들의 수법 앞에서 '승소' 혹은 '낙찰'이라는 법적 결과는 피해자들의 고통을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정현씨는 여전히 그 집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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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① <상> 진짜 돈 되는 사기
    1. • '전세 대출사기'로 반년 만에 100억…사기꾼만 웃는 '몸빵 재테크'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42415420004534)
    2. • '월세'로 알았는데 모두 '전세'…진화하는 사기, 정부는 뒷짐만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50912400004930)
  2. ② <중>끝까지 우려먹다
    1. • 세입자 피눈물 흘린 그 집...사기범은 깔세 놓고 감옥서 돈 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50521360000367)
    2. • HUG '깔세' 피해만 240채…악성 임대인 '집요한 돈벌이' 왜 못 막나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50914160005313)
  3. ③ <하> 법은 소용없었다
    1. • 사기당한 집이 '내 집'이 됐다, 매일이 지옥이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50815050004955)
    2. • 세입자 '셀프 낙찰' 지난해만 '971건'...10년 새 최대치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51114210003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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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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