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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을 선포된 뒤 지난해 12월3일 밤 서울 국회의사당에서 계엄군이 국회 본청으로 진입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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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내적 충돌을 느끼면서 최대한 소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명령을 내린 사람들의 입장에선 소극적인 것이었겠지만 보편적인 가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 적극적인 행위였다고 생각이 된다.” 한강 작가는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위해서 간 스웨덴에서, 공교롭게도 겹친 계엄 선포에 대한 질문에서 이렇게 답했다. 머뭇거림조차도 소중한 저항이라는 것은 신간 ‘명령에 따랐을 뿐!?’을 보면 새삼스러워진다.
저자인 에밀리 캐스파는 미국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실험’을 심리학적으로 또 신경과학·뇌과학적으로 접근한다. 유명한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은 이랬다. 교사(실험자)가 학습자(공모자)에게 문제를 내고 틀리면 실험 대상(참가자)은 전기 충격을 가하는 버튼을 눌렀다. 실험 대상에게는 처벌과 학습 관계에 대한 연구라고 말했다. 전기 충격 발생기는 30단계로 나눠 15~450볼트를 발생시킨다(고 안내되고 실제로는 발생하지 않았다). 학습자가 문제가 틀리면 충격 강도는 점점 높아졌다. 기계에는 ‘위험’ 경고문이 쓰여 있었다. 학습자는 자신의 심장이 약하다고 하지만 교사는 무시했다. 학습자는 150볼트가 되면 멈춰달라고 하고 300볼트가 되면 괴로워하며 문을 두드려 구조를 요청한다. 참가자가 계속하지 않겠다고 하면 교사는 ‘계속하세요’라고 명령한다. 교사는 4번까지 재촉(명령)한다. 결과는 놀라웠다. 300볼트 전에 멈추겠다고 말한 사람조차 없었고, 65%가 최대 충격까지 갔다. 결과 뒤 실험 내용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지만(가상 상황을 사용했다, 참여자는 실제로 개인을 해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등), 비슷하게 설계된 실험은 같은 결과를 보여주었다. 저자는 “지난 8년 동안 나는 다른 사람에게 실제 고통을 주는 전기 충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4만5000건 내렸다. 그중 약 1340건이 거부되었다”고 말한다. 약 2.97%다.
상황이 닥치기 전에는 자신의 ‘인간성’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밀그램 실험에는 실험 전 실험 방식을 알려주고 ‘당신은 어떨까’라고 예상하라는 110명을 대상으로 한 부가적 실험도 있었다. 실험을 끝까지 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이 학습자가 중지를 요청(150볼트)하면 멈출 것이라 했다. 밀그램은 이렇게 말했다. “상당수의 사람은 명령이 합법적인 권위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한, 그 행동의 내용과 무관하게 양심의 제약 없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권위에 대한 복종’) 밀그램은 동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1961년 텔레비전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실험을 구상했다. 아이히만은 재판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는 “괴물이 아니”라 “관료적 광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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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에 따랐을 뿐!? l 에밀리 A. 캐스파 지음, 이성민 옮김, 동아시아, 2만원 |
저자의 연구 대상이 된 것은 1975년부터 1979년까지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주의 학살, 1994년 르완다에서 투치족에 대한 후투족 민병대의 학살의 가해자다. 크메르루주는 이 기간 사이에 170만~220만명을 학살했다. 르완다에서는 단 3개월 만에 50만~60만명이 살해되었다. 가해자의 말은 아이히만과 비슷했다. “감정은 없었고 죽이는 것이 일이었으며 일단 살인을 시작하면 살인은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전업이 되었죠.”(르완다 가해자)
저자는 명령을 따르는 행동에서는 책임감이 줄어드는 것을 뇌 부위(전전두엽 피질)를 관찰해 확인했다. 공감 관련 영역(전대상 피질, 전측 섬)의 활동성도 낮았다. 다른 사람의 전기 충격이 덜 고통스러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권위에 대한 복종에서는 책임은 분산되는 것이 아니라 ‘이동’했다. 저자는 나치와 크메르루주 집단이 위계 사슬을 통해 책임을 다른 계층에게 전가하면 효율적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말한다. 비슷하게 이들 집단은 학살을 저지르기 전에 ‘비인간화’ 전략을 구사해 공감을 저하시켰다. 나치 학살 당시 유대인, 집시, 슬라브인을 열등하다고 묘사한 선전 책자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다. “하위인간은 자연이 만든 생물학적 생명체로 손, 다리, 눈, 입, 심지어 뇌의 외관까지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이 끔찍한 생물은 부분적으로만 인간일 뿐이다.” 르완다에서도 라디오를 통해 투치족을 바퀴벌레(엉지)와 뱀(인조카)으로 묘사했다.
저자는 대부분의 학살이 다른 민족·종교 사이에서 벌어졌으며 이런 상황에서 ‘비인간화’는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저자가 궁금해하는 것은 캄보디아의 같은 민족끼리 행한 ‘자가집단학살’이다. 크메르루주는 반대 세력에 대해 ‘내부에 잠복한 숨은 적’ ‘병적 요소’로 표현하고 ‘청소’ ‘분쇄’ ‘죽이기’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 ‘범주화’다. 한국인이라면 저자의 궁금증에 바로 답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과 민간인 학살, 5·18 학살 등을 겪어서다. 이때 권력 집단이 구사한 ‘비인간화’ ‘범주화’ 전략은 ‘빨갱이’였다. 거의 반세기 만에 있었던 계엄의 주도 세력도 이런 메커니즘을 잘 알고 있었다. 명령으로 움직이는 군대를 이용했고, 재임 기간 내내 ‘전 정권’과 거부권 등을 통해 반대 세력을 범주화해왔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은 ‘악의 진부함’ ‘악의 멍청함’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악은 정말로 진부하고 멍청했다.
계엄의 밤, 명령을 어기고 국회 앞으로 시민들이 모였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학살 속에서 상대를 구한 ‘불복종’의 사례에서 공감, 이해 능력, 가족의 본보기 등이 발견된다고 한다. 15일 윤석열 체포 배경에는 경호처의 ‘부당한 명령’에 대한 비협조가 있었다. 9일에는 박정훈 대령의 명령 거부가 항명이 아니라는 군사법원의 1심 판결이 나왔다. 군 검찰은 불복하고 항소장을 제출했다. ‘부당한 명령’은 적극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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