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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5 (토)

[노트북 너머] 폐 먼저, 간은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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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투데이

비흡연자와 달리 ‘비음주자’들의 사회생활은 눈칫밥과 해명의 연속이다. 밥상에 둘러앉은 모두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제시하고, 찰나의 떨떠름한 반응을 공손히 참아야 한다. 사회생활하기 힘들지 않냐는 동정도 받는다. 담배는 선택이지만 술은 기본이라는 인식이 한국 사회의 기본 설정값이다.

음주에 관대한 분위기는 사회 곳곳에 이상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한국 청소년이 어른이 되면 가장 하고픈 일은 ‘길에서 술 먹기’다. 길에서 흡연하는 행위는 ‘길빵’이라는 멸칭이 붙지만, 한강 치맥과 편의점 노상은 낭만의 상징이다. 급기야 한밤중에는 비틀거리는 만취자가 앞서는 길빵 흡연자를 나무라는 블랙코미디도 흔하다.

고도화하는 금연정책과 비교하면 금주정책은 놀랍도록 별것이 없다. 흡연 구역은 급격한 규정 강화로 10여 년 새 남극 빙하보다 빨리 쪼그라들었다. 담뱃값은 2500원에서 4500원으로 올랐고, 담뱃갑에는 손상된 각종 인체 장기 사진이 새겨졌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국민 건강을 망쳐 의료비 지출을 늘렸다며 담배회사에 소송을 걸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올해부터 담배 회사가 유해성분을 공개하도록 관리에 나섰다. 그러는 동안 술은 여전히 싸고, 소주병과 맥주캔은 나날이 알록달록 예뻐졌다.

음주로 인한 폐해는 흡연만큼 크다. 질병관리청은 국내 만성 간질환자의 15~20%가 알코올성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소주 2잔(알코올 20g)을 매일 마시면 간암 발생률은 1.33배, 간암 사망률은 1.17배 높아진다. 주취자 민폐도 상당한데, 성폭력범의 68%, 가정폭력범의 73%, 경찰관 폭행범의 87%가 술에 취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확인한 국내 연구도 있다. 간접흡연과 폐암의 위험성이 자명하지만 니코틴에 취해 가족과 경찰관을 때렸다는 사연은 들어본 적이 없다.

금주정책이 금연정책의 절반이라도 따라가야 한다. 지난해 보건복지부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의 금주 관련 예산은 10억1100만 원이었다. 2023년 기준 알코올성 간질환자 진료비는 1303억7415만 원, 알코올중독환자 진료비는 1618억2593만 원이 쓰였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악순환에 반전을 일으키기에 10억 원은 너무 적다. 같은 해 국가금연지원서비스 사업 예산은 999억7000만 원이었다.

술은 가장 가깝고 빠른 기분 전환 수단이다. 극장에 가려면 티켓값과 교통비로 최소 2만 원은 쓰게 된다. 산책이나 운동을 하려면 적어도 1시간의 여유가 필요하며, 무엇보다 잘 조성된 공원이 있는 동네에 살아야 한다. 음악과 미술로 스트레스를 푸는 생활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인 사치다. 반면 술은 집 앞 편의점에 궤짝으로 쌓여 있으며, 입에 털어 넣는 순간 잡념과 고통이 완화된다. 궁지에 몰린 사람들은 2000원짜리 만능 진통제에 의존하게 된다. 정부가 개입해 음주를 적극적으로 말려야 하는 이유다.

[이투데이/한성주 기자 (hsj@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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