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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5 (토)

[지평선] 맹모도 기가 찰 ‘7세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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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우리나라 6세 미만 미취학 아동의 1인당 사교육비가 월평균 30만 원을 넘었다. 이른바 '영어유치원'(영어학원 유치부)의 월평균 비용은 155만 원이었다. 교육부는 13일 '2024 유아 사교육비 시험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정부가 유아 사교육비 현황을 공개한 것은 처음이다. 사진은 이날 서울 강남구 한 영어유치원.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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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너무 늦으셨어요.”

아이를 학원에 보내기 위해 ‘사교육 1번지’ 대치동을 찾은 부모들이 상담 과정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선행(학습)은 돼 있죠?”란 질문에 머뭇거리면 ‘지금까지 뭐했냐’는 투의 꾸지람도 이어진다. ‘우리 아이만 뒤처지고 있나’란 불안감이 엄습할 때 결정타가 날아온다. “이번 달은 레벨테스트도 꽉 찼어요. 대기자 명단엔 올려드릴게요.” 기다려 시험을 보고 그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도 지옥이다. 일부러 어렵게 낸 듯한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원하는 반에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조바심은 더 커진다.

□ 이런 학원들의 ‘공포 마케팅’에 사교육비가 4년 연속 최고치를 경신했다. 지난해 초중고 사교육비 총액은 29조2,0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학생 수는 줄었는데 액수는 더 늘었다. 서울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참여 학생 기준)도 78만 원을 넘었다.

□ 선행 학습이 당연시되면서 사교육 시작도 중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다시 영어 유치원(영유)으로 내려가고 있다. 의대에 가려면 초등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얘기가 돌더니 이젠 ‘7세 고시’에 ‘4세 고시’란 말까지 나왔다. 전자는 초등 수학·영어 학원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 후자는 영유에 들어가기 위한 레벨테스트를 일컫는다. 더구나 정부가 처음 공개한 6세 미만 사교육비 조사에선 사교육 참여율이 2세 이하 25%, 3세 50%, 5세 81%에 달했다. 개그우먼 이수지가 모사한 ‘대치맘’의 라이딩은 현실인 셈이다.

□ ‘사교육 카르텔’을 엄단하고 킬러문항을 없애 국민 부담을 줄이겠다던 정부 공언에도 오히려 사교육비가 늘어난 건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학원들의 공포 마케팅도 문제지만 입시 제도를 수시로 바꾸고 의대 증원 혼란까지 야기, 학부모의 불안감을 증폭시킨 정부의 책임이 더 크다. 귀한 내 아이에게 모든 걸 해주고 싶은 부모 심정은 이해하나 또래들과 한창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을 가혹한 무한 경쟁으로 내모는 게 과연 맞는지도 의문이다. 아이는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커 주기만 하면 더 바랄 게 없는 법이다. 영어 단어 몇 개 더 외우게 하는 것보단 함께 놀아주고 사랑하는 게 더 나은 교육이 아닐까.

박일근 수석논설위원 ik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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