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국면에 유행처럼 번지는 '단식 투쟁'
"단식한다고 죽은 사람 없다"는데, 왜?
편집자주
여의'도'와 용'산'의 '공'복들이 '원'래 이래? 한국 정치의 중심인 국회와 대통령실에서 벌어지는 주요 이슈의 뒷얘기를 쉽게 풀어드립니다.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10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역 인근에서 윤석열 대통령 파면을 촉구하며 단식 농성 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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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정치투쟁 수단'으로 불렸던 단식이 또다시 정치권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윤석열 대통령이 석방되자 '내란우두머리 윤석열 파면 촉구' 단식 농성을 시작했고, 민주당 일부 의원들도 곡기를 끊고 동참했습니다. 얼마 전 여당에서는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이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임명하지 말라'며 국회 내 단식 농성을 하기도 했습니다. '탄핵 정국'과 맞물려 바야흐로 단식 대유행의 시대입니다.
"단식한다고 죽은 사람 없더라." 산전수전 다 겪은 최고령 국회의원인 박지원 민주당 의원의 말입니다. 단식이 이젠 더 이상 '왕년의 단식'이 아니라는 평가지요. 요즘 단식을 독재정권과 맞서 싸운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단식과 비교하긴 무리가 있습니다. 이런 대중의 평가를 여론에 민감한 정치인들도 모를 리 없을 것 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여전히 스스로 곡기를 끊는 자학을 하는 것일까요? 단식의 행간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재명(왼쪽)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2일 서울 광화문 인근 천막에서 윤석열 대통령 파면을 촉구하며 단식 농성에 돌입한 김경수 전 경남지사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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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싸울 때 뭐 했나"… 김경수의 대답은
16일 김경수 전 경남지사의 단식이 8일 차에 접어들었습니다. 김 전 지사는 윤 대통령이 석방된 다음 날 9일 오후 9시 페이스북을 통해 탄핵이 인용될 때까지 무기한 단식 투쟁을 선언했습니다.
참모들은 단식을 만류했다고 합니다. 김 전 지사 측 관계자는 "단식 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렸지만 본인 의지가 너무 강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김 전 지사는 말리는 참모들에게 "광화문에 지금 단식을 하고 계시는 시민들이 계시는데,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힘을 보태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김 전 지사가 누굽니까. '서울대 86학번' '운동권 지도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 '민주당 소속 최초 경남지사' '문재인 전 대통령의 복심' 등 그를 둘러싼 화려한 수식어가 보여주듯, 그야말로 민주당의 '친노-친문'의 적통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 전 지사의 화양연화는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에 휘말리면서 2021년 7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 확정 판결을 받고 조기에 막을 내렸습니다. 2022년 12월 5개월의 복역기간을 남기고 윤 대통령에 의해 출소당했습니다. 김 전 지사는 당시 "받고 싶지 않은 선물을 억지로 받았다"고 항의했습니다. 이후 김 전 지사는 "깊이 성찰하고 고민하겠다"며 영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김 전 지사로서는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마침 윤 대통령이 석방됐고, 김 전 지사는 누구보다 빠르게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윤 대통령이 탄핵된다면, 김 전 지사는 '당신은 정치인으로서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에 '무엇을 했다'고 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각에서는 "어차피 며칠짜리 디톡스 단식 아니냐"는 비아냥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식을 한 것과 하지 않은 것은 다릅니다. 단식의 목적이 자신의 공백을 속죄하는 것이든, 지지층의 탄핵 염원에 공감하는 것이든, 뭐가 됐든 간에 김 전 지사는 민주당 대권 주자로서 탄핵 정국 속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민주당 관계자는 "단식은 원외 정치인인 김 전 지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카드였다"며 "앞으로는 '왜 김경수인가'를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윤석열탄핵국회의원연대 소속 의원들이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복궁 서십자각 인근 농성장에서 윤석열 대통령 파면 촉구 및 헌정수호를 위한 단식 농성에 돌입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왼쪽부터 한창민 사회민주당, 민형배·박수현 더불어민주당, 윤종오 진보당, 김준혁·강득구 민주당 의원.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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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하고, 전한길도 등장… 與도 野도 '단식'
민주당 박수현 민형배 김준혁 의원과, 진보당 윤종오 의원도 탄핵을 촉구하는 단식에 동참했습니다. 개인적 차원의 계기도 있었겠지만, 이들의 단식은 정국 구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석방으로 민주·진보 진영 유권자들은 기절할 듯 놀랐습니다. 윤 대통령이 구치소를 나와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은 그들에게 공포영화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다 탄핵이 불발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한국사 강사 전한길(왼쪽 세 번째)씨가 3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마은혁 헌법재판관 임명을 반대하며 단식 농성 중인 박수영 (왼쪽 두 번째) 국민의힘 의원을 방문해 대화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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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의 단식도 명분만 빼고 보면 민주당의 단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윤 대통령 탄핵 반대를 주장하는 국민의힘 지지층 입장에서는 야권이 추천한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 임명은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입니다.
결국 박 의원이 총대를 메고 국회 내에서 단식에 돌입했습니다. 박 의원은 지난 2일 “야당의 마은혁 임명 압박은 탄핵 겁박의 전초전”이라며 “최 대행이 여야 합의 없는 마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힐 때까지 국회 본관에서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하며 불법계엄을 옹호한 한국사 일타강사 전한길씨가 격려 방문을 오는 등 박 의원의 단식은 탄핵 반대 지지층에서 호응을 이끌어 냈습니다. 박 의원은 단식 5일 차인 지난 6일 의료진의 반대와 지도부의 설득으로 단식을 중단했습니다.
하지만 박 의원의 단식 투쟁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주장입니다. 지난달 27일 헌법재판소는 마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는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마 후보자 임명 보류는 국회의 재판권 선출 권한을 침해했다"고 전원일치 판결을 내렸습니다.
정치인의 단식은 자유입니다. 그 이유가 존재감을 높이는 것이든, 지지층에 호소하는 것이든 뭐라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단식을 바라보는 유권자들의 판단 역시 자유입니다. 조기 대선 가능성이 거론되는 시국입니다. 유권자들은 어떤 이의 굶주림에 더 호응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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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기자 virt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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