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
미국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에서 주인공인 월터 화이트는 평범한 고등학교 화학 교사다. 넉넉지 않은 봉급으로 가족을 부양하느라 낮에는 학교에서 가르치고 저녁에는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들은 척추 마비 장애인이고 잔소리만 늘어놓는 아내는 늦둥이 딸을 임신한 상태다. 어느날 그는 말기암 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일생 최대의 나쁜 용기를 낸다. 자기가 죽은 뒤 남겨질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기로 결심하고는 자신의 전공을 살려 마약을 제조해 유통하기로 한 것이다. 마약을 팔아 큰 돈을 만지기 시작한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가족들의 아침 식사를 만들고, 아내와의 스킨십을 터프하게 주도하기도 한다. 죽음을 수용하자 죽음이 삶의 동력이 된 것이다. 그 결과가 범죄라는 게 문제지만.
반대로 삶에의 강한 의지가 죽음을 불러 오기도 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극 초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애순 엄마 전광례(염혜란)는 일찍 부모를 잃고 빚을 떠 안은 채 해녀 물질을 하면서 남편 병수발까지 하는 기구한 팔자다. 하지만 어떻게든 자식들은 굶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다른 해녀들이 10분 물질할 때 15분 물질하고, 조금 더 깊이 잠수해 전복 한 개라도 더 따면서 악착같이 살았다. 하지만 그 억척스러운 생의 의지가 몸에 병을 키웠다. 숨병(감압병)에 걸려 어린 자식들을 남겨둔 채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사는 건 전쟁에 나서는 장수의 마음가짐으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우리 삶의 기막힌 아이러니다.
'명랑한 유언'이라는 책을 읽었다. 구민정과 오효정 두 사람의 방송 프로듀서가 함께 쓴 책이다. 오효정 피디는 지난 2024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이 책은 갑작스레 위암4기 선고를 받고 자기 죽음을 준비하는 이와 그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그에게 닥칠 죽음이 어둡지만은 않도록 자기를 헌신해 함께 마지막을 견뎌주는 이의 교환일기다.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낮에는 이 프로그램을, 밤에는 저 프로그램을 오가며 밤새워 일했다. 통장에는 대기업 연봉을 능가하는 금액이 찍혔다. 잔고를 보면 세상 마음이 따뜻해지고 쇠했던 기력이 복구됐다. 그토록 바라던 꿈이 현실이 되어 돈으로 이어지는 순간은 엄청난 기쁨이었다. 우리 가족의 약점인 돈이 드디어 나의 무기가 되는구나. 나와 우리 가족의 어깨는 하늘 높이 솟았다. 나의 건강이 땅밑으로 꺼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말이다."(오효정) 삶의 치열함으로 자신을 연소시켜 몸속에 암이라는 새까만 그을음을 칠한 것이다.
학생들과 수업에서 이 책을 읽고 유언장을 써보게 했다. 어떤 친구는 죽음으로 중단될 자기 삶에, 어떤 친구는 남겨진 이들의 계속될 삶에 애틋한 눈빛을 보냈다. 수업을 마치면서 말했다. 삶이 너무 치열하다면 갑작스레 찾아오는 죽음을 경계하라고. 혹여 죽음이 가까이 오더라도 너무 두려워하지만은 말라고. 삶은 죽음에 이끌리고 죽음은 삶에 당겨지는 법이니 가장 살아 있을 때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이 닥쳐올 때 오히려 삶을 끌어안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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