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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1 (화)

[조성준의 파도] 지옥에서의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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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지옥 다방에 혼자 들어갔다. 그날은 월요일이었다. 원래 목적지는 을지로4가의 우래옥이었다.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노포다. 그런데 식당 문은 닫혀 있었다. 월요일이 우래옥 정기 휴무일이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실망할 겨를은 없다. 사회인의 점심시간은 여유롭지 않으니까. 망설임 없이 우래옥 옆 가게에 들어가 설렁탕을 먹었다. 식사를 해결하고 식당 밖으로 나오자 어떤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우래옥 맞은편 자리 잡은 그곳의 상호는 '헬 카페'. 직역하면 지옥 다방이다.

지옥의 문을 열자마자 느꼈다. '이곳의 파수꾼은 음악이다'. 성인 남성 몸집보다 훨씬 큰 스피커에선 재즈가 흘러나왔다. 나중에 찾아보니 스피커 가격은 내 연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도 어림없는 금액이었다. 고급 스피커에서 나온 소리는 근사했다. 메뉴판에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해주세요'라는 주의 사항이 적혀 있었다. 그날은 혼자였기에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었다.

평소라면 스마트폰을 들고 이것저것 보며 시간을 때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커피잔을 앞에 두고 지옥이 선사하는 음악 속에서 15분 정도 멍하니 있다가 일터로 복귀했다.

월요일에 다녀온 지옥 다방이 한동안 은은하게 아른거렸다. 따지고 보면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나왔을 뿐이다. 그 짧은 순간이 종종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상태'가 주는 해방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목적의식도 없고, 책임감도 없고, 시간 흐름마저 희미한 상태.

최근에 읽은 해외 토픽이 떠올랐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재즈 킷사' 형태의 카페가 속속 생겨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킷사란 일본어로 찻집이다. 즉 재즈 킷사란 재즈 음악을 위주로 틀어주는 카페다. 1960년대 도쿄 신주쿠에 재즈 킷사가 우후죽순 생겨났고 그중 일부는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작가가 되기 전 재즈 킷사를 10년 가까이 운영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을지로4가 지옥 다방도 재즈 킷사 분위기가 짙은 곳이다.

이런 공간은 일종의 도심 속 명상센터 역할을 한다. 재즈 킷사에선 되도록 대화는 제한된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온전히 음악에 빠져드는 것이 이곳의 미학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차분하게 내려앉는다. 재즈 킷사가 전 세계 곳곳에서 부활하는 이유는 현대인에게 명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인공지능의 무서운 발전에 관한 소식은 매일 쏟아진다. 첨단 기술과 상관없을 것 같던 내 직업에도 인공지능이 들어오고 있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이 편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도구가 발전할수록 높은 생산성이 요구된다. 과거엔 두 명이 했던 일을 이젠 한 명이 하는 식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주사위는 던져졌다. 하나만 잘해서 먹고사는 시대는 끝난 것 같다. 우리는 좋든 싫든 복합적으로 생각하며 전략을 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때론 무장해제 상태로 마음을 청소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무거운 마음으론 따라가기 힘들다. 첨단 시대에도 명상이 필요한 이유다. 그래서 추천한다. 잠시나마 자신을 잊을 수 있는 망각의 지옥을 찾고 그곳에서 가끔 15분만이라도 머무는 것을.

[조성준 편집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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