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이재명 대통령이 25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워싱턴DC=사진공동취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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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보다도 더 보수적인 길을 택했다."
3박 6일의 강행군으로 미국·일본 순방을 마친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외교가의 평가입니다. 이 대통령은 취임 후 첫 방문국으로 이전 정부가 미국을 먼저 선택해온 전례를 깨고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더구나 진보 정권의 단골 기조인 역사문제나 전략적 모호성을 내세우는 것은 이번 한일·한미 정상회담에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중국 전승절을 계기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참석 가능성을 사전 인지한 상황 속에서도 이 대통령은 "한국이 과거처럼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할 수 없는 상태"라며 한미동맹이 한국 외교의 중심임을 재확인했습니다.
'정치인' 이재명과는 확실히 다른 행보입니다. 대통령 당선 이전 "중국에도 셰셰, 대만에도 셰셰",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지배체제 유지" 등의 발언을 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특히 이번에 공개된 한일 정상 공동언론발표문은 사실상 과거사 문제를 '로키(low key)'로 다루고 있어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외친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확인하는 첫 현장이었던 한일·한미 정상회담의 결과가 이토록 '보수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힘의 정치'로 귀환하는 국제정치…체력이 좋아야 구도를 만든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5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한미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워싱턴DC=사진공동취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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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는 바둑과 같습니다. 적자생존의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외교력)을 높이기 위해 집(관계)을 많이 지어야 하고, 나와 적대적 관계에 있는 상대방의 집(관계)을 허물어야 합니다. 침묵 속에서도, 맹렬하게. 바둑이라는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려면 전체 판을 유리하게 잡아야겠죠.
그러나 그 어떤 치열한 싸움을 벌이든 바둑도 외교도 기본은 '체력'입니다. 체력이 없으면 전체 수를 읽어내지 못한 채 상대방에게 휘둘리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외교의 체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정보력과 국방력, 그리고 나의 편을 들어줄 수 있는 '세력'을 갖추지 못하면 내가 원하는 구도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출범으로 한미일 협력은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하고, 북중러의 전략적 이해관계는 북러 군사동맹으로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진 상황에서 이재명 정부가 외교 체력을 키우기 위해 해야 하는 조치는 무엇일까요?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한미동맹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부 수립 직후 한국 전쟁을 겪고 국가의 안보를 한미동맹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외교의 중심은 한미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죠.
한 전직 고위 외교관은 "중국은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약화시키기 위해서라도 한미동맹의 심화를 막아야 하고, 이를 위해 한국과 안정적인 외교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러시아도 미국과 유럽 주도의 대러제재 프레임을 약화시키기 위해 한국에 대화를 제안한다"며 "중국과 러시아 모두 한국을 향해 러브콜을 보내는 지정학적 배경엔 역설적으로 한국의 외교체력인 한미동맹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외교 체력 '한미동맹' 보장 위해 택한 한일 협력…'과거사', 관리모드로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23일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소인수 정상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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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한미동맹이 흔들립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공유하던 동반자 미국은 더 이상 없습니다. 미국은 오로지 자국 이익을 위해 희생하라며 관세와 국방비 인상 요구로 동맹국들을 헤집어 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핵·미사일 기술이 고도화된 상황에서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은 북한뿐 아니라 외부 위협을 억지하는 데 여전히 필수조건입니다. 15% 이상의 대외 교역을 차지하는 미국 시장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이 대통령은 돌파구로 '한일 관계'를 이용했습니다.
"일본 전후체제를 본격적으로 개시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나기 전 한국을 먼저 방문했어요. 한국과 일본은 중국의 팽창을 억지할 수 있는 미국의 핵심 아시아 동맹국이기 때문에, 미국이 좋아할 걸 알고 그렇게 한 것이죠. 그렇게 일본은 '론·야스 밀월'을 만들었습니다."
전직 외교 고위 당국자
나카소네 총리가 한국을 먼저 방문해 론-야스 밀월 관계를 만들었다면, 이번엔 이 대통령이 일본을 먼저 방문한 뒤 트럼프 미 대통령과 만나 '이-트럼프 밀착 관계'를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단순히 트럼프 대통령의 호감뿐만 아니라 아직 남아있는 미국의 정책관료들의 호감을 이끌어냈습니다. 공동성명은 도출해내지 못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변덕을 고려해 '호감'을 무기로 안정적 관계를 이어나가는 이른바 뉴 노멀(new normal)도 큰 불안 없이 조성했습니다.
문제는 한일 핵심 현안인 과거사가 희생당해야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발표한 정상 공동언론발표문에는 과거사 문제가 직접적으로 언급돼 있지 않습니다. 이 대통령은 이미 여러 차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해법에서부터 일본군 위안부 합의까지 기존 과거사 해결법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과거사 문제는 '로키(low key)'로 다루며 미래협력에 집중하겠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외교 기초체력'인 한미동맹을 되살리기 위해 과거사 문제를 후순위로 두는 모습입니다.
외교 기초체력 다진 이재명 정부, 전승절 '북중러' 연대 직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7월 27일 전승절 69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평양=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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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한미일 협력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은 즉시 우리가 확인한 결과는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였습니다. 이 대통령이 한미일 협력을 강화한 직후, 중국은 전승절 참석 국가 명단을 공개했습니다. 공개된 명단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포함돼 있었죠. 김 위원장이 여러 국가의 정상들이 참석하는 대외 행사에 참석하는 건 처음입니다. 더구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우측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좌측엔 김 위원장이 나란히 앉는다고 합니다. 끈끈한 '북중러 연대'가 확인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불량 핵무장국' 북한의 전략적 지위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씁쓸한 상황입니다. 이는 한국 안보를 불안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사 갈등을 후순위로 두면서까지 한일관계를 개선하고 한미동맹을 재확인해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한미동맹과 한미일 안보협력이라는 기초체력을 다지는 작업을 하기 위해 이 대통령이 '정치인' 이재명으로서 했던 발언을 모두 뒤집어야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수보다도 보수적인, 친미·친일적인 외교 행보를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라고 포장했다가 직면하게 된 '김정은의 중국 전승절 최초 참석'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묵묵히 가야 할 길 가야…기초체력 토대로 외교전선 넓히는 행보는 '이제부터'
기사의 도입부로 다시 돌아가볼까요. 바둑도, 외교도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나요?
그렇습니다, 체력입니다. 사방이 공격해도 먼저 인내하고 내 돌을 지켜내면 판세는 언제든 뒤집을 수 있습니다. 공격에 앞서 내 지렛대를 튼튼히 하는 게 외교의 기본이요, 바둑의 기본입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판에 휘둘리면 전체 판은 보지 못하고 상대방의 수를 허겁지겁 뒤쫓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패가망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게 외교가의 설명입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힌트는 최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한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의 발언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비핵 평화를 진전시키기 위한 대화의 복원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우선 긴장이 완화되고 신뢰가 쌓여가야 하는데, 그런 노력들을 해가려고 합니다. 외교적 노력이죠. 그 일환으로 저희가 이런(북미대화) 제의를 한 거고, 미국과 협의를 진행한 것이고, 이제 북한의 반응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 29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위 안보실장은 29일 '한미일-북중러 분열선이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어떤 역할을 할 생각인가'라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습니다. 한미동맹을 다져놨으니, 이제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다른 외교적 노력들도 기울이겠다는 취지입니다. 여기에는 한중·한러관계뿐만 아니라 남북관계도 포함돼 있겠죠.
그냥 처음부터 한미동맹은 내팽개쳐버리고 북한을 설득할 수 있는 중국과 러시아와 관계개선을 도모했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북한조차 이해하고 있는 '협상의 조건'을 이해하지 못한 주장입니다. 애초에 6자회담과 북미대화가 어떻게 성사될 수 있었는지를 떠올려 봐야 합니다.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을 고도화함으로써 몸집을 불렸고, 국제사회는 대북제재를 강화해 북한의 경제 숨통을 옭아맸습니다. 그렇게 반발과 충돌을 반복하다가 제재로 북한이 체제 유지에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이 사정거리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인 2018년 비로소 대화에 나섭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북한과 '피로 맺은 동맹'을 구축하면서 한국보단 북한의 이해관계에 부합한 한반도 정세를 조성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북러 군사밀착으로 잠시 북한과 관계가 소원해졌지만, 지난 5월 중러 정상 공동성명을 통해 "북한에 대한 강압적 제재·압박을 포기해야 한다"며 북한의 불법적 핵보유를 정당화했습니다. 한국의 안보적 사활이 걸린 한반도 비핵화에 등 돌려버린 중국과 러시아를 회유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한미동맹·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를 두고 '밀당'(밀고 당기기)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밀당과정에서 북미 정상이 극적으로 대화에 나서기 시작해 판을 뒤엎어버리는 시나리오도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 대통령의 보수보다도 보수적인 외교행보는 결국 남북 화해 및 한반도 평화 정착이라는 '걸어보지 못한 길'을 위한 수단이라는 게 외교가의 설명입니다.
한미동맹 활용한 외교 지렛대, 정책결정자 변죽으로 활용도 떨어져
한 가지 명심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 외교에서 한미동맹과 한미일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초체력도 인내심과 확고한 기품(바둑 성향)이 없으면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실제 대한민국 외교 방향을 결정하는 최고 결정자인 대통령에 의해 한미동맹이 그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대표적입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 지렛대를 높이기 위해 윤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한미·한미일 안보협력을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대국민 설득 없는 한일관계 개선과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한 대통령의 공격적 발언으로 지렛대는 오히려 북러 군사동맹을 불 지피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한일관계도 여전히 불안합니다.
이 정부는 어떨까요. 한미·한미일 협력을 다진 첫 외교 조치는 국민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변 국가들의 변화에 이끌려 외교 방향과 정책을 바꾼다면, 한미·한미일 협력은 더 이상 지렛대가 아닌 '약점'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외교가에서 말하는 '지렛대를 높이기 위한 길'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한 국민으로서, 이번 정부만은 중간에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고 긴 호흡으로 인내하며 외교라는 바둑에서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험난한 시기, 한국의 외교 지렛대가 한반도 평화로 가는 도입구를 마련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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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연 기자 munj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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