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북한 ‘안러경중’의 메시지

김정은 방중, 은둔·폐쇄성 탈피 신호탄
인민복 아닌 정장 차림으로 다자외교

북중러, 각자 대미관계 정상화에 초점
군사적 동맹 수준 밀착 사실상 불가능

北, 체제·경제 위해 美 관계 개선 필수
‘신냉전’ 협상력 차원의 정치적 메시지

[베이징=AP/뉴시스]김정은(오른쪽) 북한 국무위원장과 시진핑(가운데)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3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을 참관하고 있다. 베이징=AP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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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3일 중국의 전승절 80주년 행사 당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톈안먼 망루에 오른 장면은 그 자체로 상징적이다. 66년 만에 북중러 3국 정상이 한자리에 선 것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폐쇄·은둔의 독재국가 권력자가 처음으로 다자외교 무대에 섰다는 점에서다. 당장은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립 구도가 부각되지만, 김 위원장 입장에서 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직접대화로 가는 과정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두 가지 측면에서다. 우선 김 위원장은 어떤 식으로든 핵 보유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국제 사회에서 발언권이 있는 중러 양국을 등에 업으려는 이유다. 또 북한 입장에선 북미관계 개선 없이는 경제 상황을 호전시키기 어렵다. 중국의 지원도 미국 주도 글로벌 경제 질서하에선 한계가 뚜렷하다. 결국 북한은 ‘하노이 노딜’에 대한 평가 과정에서 ‘한국이나 중국의 관여 없는’ ‘대등한 주권국가로서’ 북미 직접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의 다자외교 무대 데뷔

김 위원장의 다자외교 참여는 북한이 그간의 폐쇄성에서 탈피할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간 이념적 거리가 가까운 국가들과의 양자외교에만 그쳤던 것과 달리 이번 중국의 전승절 행사는 서방권 및 중립지대 국가들도 일정 부분 발을 걸친 자리였다. 전 세계 주요 언론들이 그가 방중 기간 내내 인민복 대신 정장을 입은 것에 의미를 부여한 건 김 위원장이 ‘정상국가’ 지도자로서의 행보를 이어갈 가능성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 최고 존엄의 다자외교 참여는 물론 처음이 아니다. 김 위원장의 조부인 김일성 주석은 10여 차례 다자외교 무대에서 존재감을 알렸다. 반면 김 위원장의 부친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중국과 러시아를 비밀리에 오간 것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은둔·고립으로 일관했다. 이에 비해 김 위원장은 ‘핵무력 완성’을 기반으로 정치적·외교적 기반을 넓히고 이를 경제위기 타개의 계기로 삼으려는 듯하다.

그렇다고 북한이 당장 국제 외교 무대에 활발하게 얼굴을 내밀 가능성은 높지 않다. 대신 중국·러시아를 뒷배 삼아 국제 사회에서의 입지를 차근차근 넓혀 나갈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안러경중’을 외교정책의 기조로 삼으려 한다는 분석은 이와 맥이 닿아 있다. 안보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경제는 중국과 협력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러’와 ‘경중’은 무게감에서 차이가 크다. 김 위원장과 시 주석이 완전한 관계 복원에 의기투합했다지만, 양측 모두 대미관계를 상수로 상정하고 있어 언제든 이해관계가 엇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대외정책의 최종 목표는 북미관계 정상화에 있다. 체제 안전 보장과 경제난 타개를 위한 가장 확실하고 사실상 유일한 방안이다. 김 위원장이 집권 후 처음으로 전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다자외교 무대에 참석한 것은 다분히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을 향한 메시지의 성격이 짙다.

그래픽=김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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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핵 보유국’ 인정받은 北

이번 중국 전승절 행사를 통해 ‘반서방 연대’를 과시한 북중러 3국은 모두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시 주석은 직전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까지 포함하면 반서방 연대의 실질적 리더이자 호혜적 경제협력의 주도자로서의 위치를 점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SCO 정상회의에 참석했던 미국의 우방국 인도·튀르키예의 전승절 행사 불참으로 한계도 드러났다. 푸틴 대통령은 국제 사회에서의 고립에서 벗어났음을 과시하는 동시에 향후 재개될 러우전쟁 종전 협상의 동력을 일부 회복한 측면이 있다.

최대 승자로는 김 위원장이 꼽힌다. 그가 기차를 타고 중국 베이징을 향하는 순간부터 전 세계 언론이 이를 주목했고, 중러 정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톈안먼 망루에 오른 장면은 그 자체로 빅뉴스였다. 김 위원장은 푸틴 대통령과 브로맨스를 과시하며 정상회담까지 내달렸고, 시 주석으로부터는 외빈 의전서열 2위 자리를 제공받은 데 이어 유일하게 정상회담 이후 만찬회동까지 가졌다. 중러 모두 각자의 이해관계가 우선했을 테지만, 적어도 북한의 ‘전략적 가치’가 상당한 수준이라는 점은 분명하게 확인된 것이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북한이 러시아에 이어 중국으로부터도 핵 보유국으로 인정받았을 가능성이다. 중국은 북중 정상회담 관련 공식 설명과 언론 보도에서 ‘한반도 비핵화’라는 문구를 배제했다. 이를 두고 중국이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후반에 단행했던 한반도 정책 3원칙(평화와 안정, 비핵화, 대화와 협상)의 수정을 공식화한 거란 분석이 나온다. 앞서 중국은 2022년 11월 한중 정상회담에서 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시 주석에게 주문한 북한 핵·미사일 도발 관련 건설적 역할에 대한 언급을 발표문에 담지 않았다.

북한 매체가 6일 보도한 김정은(왼쪽) 북한 국무위원장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4일 정상회담 후 만찬회동 장면. 평양=조선중앙TV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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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선 중국이 한반도 정책 원칙의 수정 여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은 채 한중 및 미중관계에서 외교적 지렛대로 삼을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중국은 지난해 5월 한중일 정상회의 공동선언문에 한국 측 요구인 ‘한반도 비핵화’ 문구가 담기는 데 동의했다. 당시 북한이 “내정 간섭”이라고 반발하자, 중국 외교부는 해당 용어를 사용하지 않은 채 “한반도 정책에 변화가 없다”고 얼버무렸다.

‘한미일 vs 북중러’ 구도의 메시지

중국 전승절 행사를 경과하면서 외견상 ‘한미일 대 북중러’ 대립 구도가 뚜렷해졌다. 하지만 북중러 3국이 군사·안보 분야에서 ‘동맹’ 수준으로 밀착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이다. 무엇보다 3국 차원의 공동 조치나 프로젝트가 없고, 분야별 협력도 양자관계 중심이다. 또 3국 모두 사실상 대미 관계를 최우선에 두고 있어 적잖은 현안에서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냉전기 중소 분쟁, 주체사상을 앞세운 북한의 독자노선, 탈냉전기 미중관계 개선과 북한의 고립 경험 등이 지금까지도 얽히고설켜 있다.

이번에 북중러 3국 정상회담이 개최되지 않은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우리 외교부는 중국이 불량국가(북한)·전범국가(러시아)와의 밀착에 대한 국제 사회의 우려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고 분석했는데, 대미 관계 측면에선 북한도 마찬가지였을 수 있다. 체제 안전 보장과 경제난 타개라는 김 위원장의 지상과제는 북미관계 정상화 이후에야 가능성이 열리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중러 양국과의 과도한 밀착이 대미 관계에 도리어 부담이 될 거란 판단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의 북중러 밀착은 동맹으로의 진전이 아닌 ‘전략적 제휴’에 가깝다.

최근 국제 사회의 기류를 ‘신냉전’으로 규정하는 의견이 있지만, ‘한미일 대 북중러’ 대립 구도는 정치적 수사이자 외교적 메시지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당장 냉전 시기와 달리 글로벌 공급망과 무역관계는 진영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 주요국이 모두 중첩돼 있다. 진영 구분 자체가 불가능하고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북한이 냉전 구도를 선호한다는 주장도 뇌피셜에 가깝다. 북한이 중러 양국을 뒷배 삼아 위협의 강도를 높일 가능성은 있지만, 미중 정면충돌과 냉전 구도의 심화가 북미 직접대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모를 리 없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 모습. 하노이=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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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금의 ‘한미일 대 북중러’ 대립 구도는 북한 입장에선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의식한 정치적 메시지의 성격이 강하다. 또 안러경중 기조는 미중 갈등 상황에서 대미 협상력을 확보하기 위한 능동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핵 보유국으로서 美와 직접협상”

북한은 2019년 ‘하노이 노딜’ 이후 북미관계 정상화의 경로로 ‘핵 보유국 지위’를 상정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하며 핵무력 증강에 집중하는 한편 미중 패권 경쟁과 러우전쟁 등 외부 환경을 전략적 입지 구축의 기회로 활용했다. 최근의 안러경중 움직임은 그 일환이다. “북러 밀착과 북중관계 복원 등을 통해 핵 보유를 공식화한 뒤 이를 전제로 미국과 직접협상을 재개해 경제제재를 해제하려 한다”(통일연구원)는 것이다.

물론 북미 정상이 마주 앉기 전까지 북한은 이전처럼 위기를 점증시킬 가능성이 높다. 내달 조선노동당 창건 80주년 열병식에서 고체엔진 탑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20형을 공개할 가능성이 벌써부터 거론된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첫 ICBM 시험발사를 감행할 거란 관측도 나온다. 북미 직접대화가 절실하지만 결코 저자세로 임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자기최면이다.

양정대 선임기자 torch@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