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악' 외쳐선 대안 경쟁 난망
여당 내 檢 개혁 신중론마저 침묵
이재명 대통령이 9월 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정청래(오른쪽)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장동혁(왼쪽) 국민의힘 대표와 오찬 회동을 갖기 전 서로 손을 맞잡은 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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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감정이 때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다는 기형도의 시처럼 말이다. 흔히 '질투'를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하지만,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것을 넘어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성찰을 통해 삶의 원동력을 제공하는 '나의 힘'이 되기도 한다. 가령 잘나가는 상대를 두고 "운이 따랐을 뿐"이라고 깎아내리기보다 "저 사람의 장점은 무엇일까"부터 생각해 보는 건 어떠한가. 경쟁심을 자극해 자신의 실력을 쌓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면 질투라는 감정은 성장 동력으로 바뀔 수 있다.
사실상 양당제인 한국 정치에선 상대의 장점을 차용해 경쟁력을 높인 사례가 적지 않다. 2012년 총선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영입해 '경제민주화' 의제를 선점했다. 경제민주화는 당시 진보 진영의 주요 의제였다. 2011년 10월 재보궐선거에서 보편적 복지를 내세운 야당에 서울시장을 뺏긴 새누리당이 총선 위기감으로 경제민주화를 정강정책에 반영하며 선수를 친 것이다. 보수 정당이 개혁 이미지를 확보함으로써 '야권단일화' 등 선거 공학에 몰두했던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을 상대로 예상외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작금의 정치에선 증오가 질투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상대를 성찰을 위한 거울로 삼는 게 아니라 무릎을 꿇리거나 아예 존재하지 말아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자신의 주장을 절대선이자 진리인 양 여기는 탓에 대안 제시 경쟁을 통해 국민의 선택지를 넓히는 데는 도통 관심이 없다. "악수는 사람하고만 하겠다"는 정청래 민주당 대표, "모든 것을 바쳐 이재명 정권을 끌어내리겠다"던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의 취임 일성이 대표적인 사례다. 조국 조국혁신당 비상대책위원장도 사면 직후 국민의힘을 향해 "극우 정당과 세력은 반드시 소멸시켜야 한다"며 증오 정치에 가세했다.
법정신의학자 라인하르트 할러의 저서 '모든 것을 파괴하는 어두운 열정: 증오의 역습'에 따르면, 증오의 본질은 두려움이다. 과거 폭력 피해를 입은 청소년의 경우 다시 공격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극심한 증오로 발현된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공격성을 피해 경험으로 정당화하고 증오로 점철된 폭력성으로 자존감을 강화한다. '정치검찰'에 대한 피해의식과 분노가 큰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방조 혐의로 정당 해산 두려움이 큰 국민의힘이 증오 활용에 매달리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복잡다단한 갈등을 관리하고 민생을 개선하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잘하기 경쟁을 통해 여야가 상식에 부합하는 결론을 내리기 바란다"며 협치를 당부한 이유다. 증오로 작동되는 정치가 과연 민생을 챙기는 상식적인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을까.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힘을 쏟는 검찰개혁 논의가 답을 말해준다. 강경파가 속전속결 입법을 주도하는 건 범여권 내 검찰에 대한 증오가 크다는 의미다. 내년 지방선거 출마를 염두에 둔 의원일수록 강경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증오를 활용해 정치적 이해를 챙기면서 정작 수사·재판 지연 등 민생 피해를 우려해 차분한 논의를 주장하는 당내 의원들의 입에도 자물쇠를 채우고 있다.
김회경 정치부장 herm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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