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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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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당시 수류탄 위로 몸 던져 전우 구한 20살 美 해병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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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전쟁부, 데이븐포트 상병 전사 74주기 기려

    “죽음 앞에서 희생 정신 발휘” 명예훈장 추서

    6·25 전쟁 당시 적군의 수류탄 위로 몸을 던져 전우들을 구하고 본인은 장렬하게 산화한 미국 해병대원의 사연이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미국에서 군인에게 주어지는 최고 영예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 수훈자인 이 해병대원 이름은 잭 데이븐포트(1931∼1951)다.

    세계일보

    6·25 전쟁 참전용사인 잭 데이븐포트(1931∼1951) 미국 해병대 상병. 전사 후 명예훈장이 추서됐다. 미 전쟁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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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전쟁부는 22일(현지시간) 데이븐포트 전 해병대 상병의 전사 74주기에 맞춰 고인의 짧은 생애를 소개하는 글을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데이븐포트는 1931년 9월 미국 중서부 미주리주(州) 캔자스시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무척 활동적인 성격이었던 데이븐포트는 고교 시절 내내 야구에 푹 빠져 지냈고, 지역 신문사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

    1949년 고교를 졸업한 데이븐포트는 주립대인 캔자스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미식축구팀 선수로 활약함과 동시에 수준급인 권투 실력을 바탕으로 아마추어 복싱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대학 생활이 1년쯤 지난 1950년 6월25일 한반도에서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도입한 징병제가 아직 남아 있을 때였다. 데이븐포트는 군 복무를 결심하고 1950년 7월 해병대에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튼튼한 체력과 뛰어난 용기로 ‘다이너마이트’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1950년 12월 한국에서 북한군 및 중공군과 싸우던 미 해병대 1사단 5연대 3대대에 배치됐다.

    당시는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군과 미군 등 유엔군이 북진을 단념하고 후퇴를 거듭하던 어려운 시기였다. 훗날 캔자스시티의 지역 신문사는 데이븐포트에 대해 “최후의 희생을 치르는 날까지 거의 끊임없이 최전선에 있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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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의 마운트 모리아(Mount Moriah) 묘지에 있는 잭 데이븐포트 해병대 상병의 묘비. 그가 한국에서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명예훈장 수훈자라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SNS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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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9월21일 상병 계급이던 데이븐포트는 분대장으로서 부하들을 이끌고 서울 부근의 한 진지를 방어하고 있었다. 미처 예상치 못한 적군의 기습이 시작됐을 때 그는 분대원들에게 각자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침착하게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 그런데 적군이 던진 수류탄 한 개가 갑자기 진지 안으로 떨어졌다. 운동 신경이 남달랐던 데이븐포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순식간에 몸을 날려 수류탄을 덮쳤다. 당시 그의 나이 겨우 20세였다. 어린 분대장의 장렬한 최후를 바로 곁에서 지켜본 전우들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웠고 결국 적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52년 1월 고인의 유해는 본국으로 송환돼 캔자스시티의 가족 곁으로 돌아갔다. 1953년 1월 미 전쟁부는 데이븐포트에게 명예훈장을 추서했고, 고인을 대신해 아버지가 이를 받았다. 전쟁부는 “데이븐포트의 리더십은 적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는 데 기여했다”며 “거의 확실한 죽음 앞에서도 뛰어난 용기와 희생 정신을 발휘했다”고 고인의 공적을 기렸다. 전후 살아서 미국으로 돌아간 데이븐포트의 전우들은 앞다퉈 고인의 유족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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