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수혜 미끼 ‘말 듣겠다’ 계약 요구
개별 학교 채찍 1라운드 뒤 당근 제시
“자율성 포기 못해”… 9곳 중 7곳 퇴짜
편집자주
‘그레이 아나토미’는 한국에도 팬이 많은 미국 드라마입니다. 외과의사가 주인공이어서 제목에 ‘해부학’이 들어가고 무대는 병원이죠. 여성·인종·성소수자 차별, 가정 폭력 등 사회 병폐 이슈가 극에 등장하고, 바로 이런 요인이 장수 비결로 꼽힙니다. 워싱턴 특파원이 3주에 한 번, 미국의 몸속을 들여다봅니다.22일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 소재 버지니아대의 캠퍼스 중앙에 있는 도서관 로툰다 앞 잔디밭. 동아리방도 주변에 몰려 있어 학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샬러츠빌=권경성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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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현지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남서쪽으로 약 180㎞ 떨어진 버지니아주(州)의 공립대 버지니아대.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설립한 이 주립대는 매년 대학 순위 발표 때 상위권에서 빠지지 않는 명문대다. 차로 2시간 30분 달려 도착한 이 대학 샬러츠빌 캠퍼스는 단풍으로 울긋불긋했고, 지난달 새 학기 시작 뒤 차오른 학생들의 활기도 여전해 보였다.
22일 미국 버지니아주 샬럿츠빌에 있는 버지니아대 캠퍼스 내 뉴컴홀 인근을 학생들이 통행하고 있다. 샬러츠빌=권경성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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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대는 이달 초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고등교육의 학문적 우수성을 위한 협약’ 체결을 제안받은 9개 대학 중 한 곳이다. 행정부 정책을 잘 따르는 대학에 연구 보조금 등 연방정부가 제공하는 혜택의 우선권을 준다는 게 협약의 골자다. 그러나 17일 폴 머호니 버지니아대 임시 총장은 협약에 서명하지 않겠다는 서한을 백악관에 보냈다고 밝혔다. 9곳 중 5번째 거부였다.
음악을 함께 전공하는 이 학교 4학년생 경제학도 맥스웰 미첼은 캠퍼스 중심인 로툰다 앞 잔디밭에서 과제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로마 시대 신전 판테온을 닮은 이 도서관 주변은 그가 학교에서 가장 즐겨 찾는 곳이다. “트럼프 대통령 재집권 뒤 학교 분위기가 약간 뒤숭숭해졌다”고 한국일보에 전한 그는 “협약을 발판으로 대학과 고등교육에 깊숙이 개입하겠다는 연방정부의 발상 자체가 위험하다는 게 내 생각”이라며 “총장의 결정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22일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의 버지니아대 캠퍼스 내 도서관 로툰다 앞 잔디밭에서 본보와 만난 이 학교 4학년 경제학도 맥스웰 미첼. 샬러츠빌=권경성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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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행정부의 의도를 맥스웰은 의심했다. “그들이 완전히 도를 넘었다. 청년들에게 자신들의 의제를 강요하고 우리가 그들에게 저항하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듯하다”며 “대학이 연방정부 자금에 의존하고 있는 게 현실인 만큼 불편한 관계가 대학에는 도전이 될 수밖에 없지만 대학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학생들의 이익”이라고 말했다.
인기 총장의 사임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유세 때부터 자신에 대한 기본 태도가 비판적이던 자국 대학들을 손보겠다고 별러 왔다. 하버드대를 비롯한 명문 사립대들과 더불어 최상위권 공립대인 버지니아대도 주요 표적이었다. 올해 초 취임하자마자 그는 캠퍼스 내 반(反)유대주의 및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의 근절 등을 명목으로 미국 대학들에 정책 변경을 요구했다. 하버드대 교육대학원장을 지낸 뒤 2018년부터 버지니아대 총장을 맡아 온 제임스 라이언은 적극적인 DEI 옹호자였다. 그가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을 못 이기고 지난 6월 끝내 사임한 일은 학생들에게도 충격이었다.
로툰다 잔디에서 본보와 만난 이 학교 4학년 정치학도 카멀라(여·가명)는 “인기 있고 학내 구성원 대다수에게 사랑받던 전임 총장이 DEI 정책에 매진하다 쫓겨난 것은 대학이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지를 둘러싼 (진보와 보수 진영 간) 문화 전쟁의 결과”라며 “그들(트럼프 행정부)은 보수 이념을 힘으로 관철·보존하려 하고 있다. ‘사상의 열린 시장을 추구한다’는 그들의 주장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행태”라고 꼬집었다.
22일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의 버지니아대 캠퍼스 내 학생회관 뉴컴홀 근처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이 학교 1학년생 에반 탱이 본보와 만나고 있다. 샬러츠빌=권경성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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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핵심 가치로 여기는 미국 사회에서 성장하며 학생들이 체화한 것은 학문 공동체의 자율성과 독립성이었다. 이 학교 학생회관 격인 뉴컴홀에서 본보와 만난 컴퓨터공학 전공 1학년생 에반 탱은 “협약 안에 동의할 만한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권력에 의해 대학에 강요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수학을 전공하는 1학년 여학생 메러디스도 본보에 “솔직히 협약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협약 서명 거부를 대다수 동료 학생이 정보에 입각해 지지하고 있는 만큼 나도 동의한다. 트럼프 행정부와의 향후 관계 설정도 학내 구성원 간 숙의가 토대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천재적 포퓰리스트
트럼프 행정부의 명문대 순치 시도는 강압 일변도였고 개별 대학을 각개 격파하는 식이었다. 친(親)팔레스타인 캠퍼스 시위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대학을 문책하겠다며 2월 ‘반유대주의 근절 태스크포스’를 만들었고, 하버드대, 컬럼비아대, 존스홉킨스대 등 10곳을 지목해 조사를 벌였다. 3월부터는 브라운대, 코넬대, 프린스턴대 등으로 범위를 넓혀 △DEI 프로그램 폐지 △학생 입학과 교수 채용 관련 정보 제출 △외국인 유학생 입학 요건 강화 등을 추가로 요구했다. 인위적 다양성이 남성과 미국인을 거꾸로 차별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주창한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실현을 방해한다는 우파적인 인식에서였다.
제374회 미국 하버드대 졸업식이 열린 5월 29일 미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 하버드대 캠퍼스 내 와이드너 도서관 앞 풍경.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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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동부 명문 사립대의 상징적 존재인 하버드대가 본보기였다. △연방 자금 지원 중단 △유학생 유치 금지 △면세 혜택 박탈 등을 시도하며 집중적으로 괴롭혔다. 트럼프 행정부가 막은 하버드대 대상 정부 보조금 규모가 22억 달러(약 3조1,600억 원)에 달했다. 정작 하버드대는 항전했고 지난달 연방 법원으로부터 지원금 중단 조치를 취소하라는 1심 판결을 끌어냈지만 반면교사 효과가 상당했다. 컬럼비아대가 4억 달러(약 5,700억 원) 규모의 연구 기금 복원을 위해 3년간 2억 달러(약 2,900억 원)를 정부에 바치기로 했고 브라운대도 10년간 5,000만 달러(약 700억 원)를 내겠다고 약속했다. 일종의 벌금이었다. 펜실베이니아대는 성전환자(트랜스젠더) 선수의 스포츠경기 출전을 일부 제한하기로 합의했다. 잘못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자금을 지키려는 타산적 경영 마인드였다.
회유 병행: 전략의 진화
미국 뉴햄프셔주 해노버에 있는 다트머스대는 꽤 오래 망설이다 트럼프 행정부로부터 고등교육 우수성 협약 서명 제안을 받은 9개 대학 중 6번째로 지난 18일 느즈막이 협약 거부를 선언했다. 그보다 앞선 지난 3일 찾은 이 대학 캠퍼스 내 도로에는 이미 ‘트럼프 협약을 거부하라’는 항의가 쓰여 있었다. 해노버=권경성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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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대통령의 대학 길들이기 전략은 10월을 기점으로 과감해졌다. 월초 9개 대학에 10개 조항으로 구성된 고등교육 우수성 협약 초안을 보내고 이달 20일까지 검토 결과를 회신해 달라고 요청했다. 블룸버그통신은 관계자들이 피드백을 토대로 협약을 수정해 다음 달 최종 버전을 배포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해당 협약에는 연방정부로부터 지원금이 포함된 혜택을 우선 받으려면 따라야 할 조건이 담겨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12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루스소셜을 통해 “고등교육이 갈 길을 잃고 ‘워크(woke·적극적 진보 의제 추구)’, 사회주의, 반미 이념 등으로 우리 청년과 사회를 오염시키고 있다”며 연방정부 협약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전체 대학으로 ‘충성 맹세’ 대상 범위를 확대하는 한편 강압과 회유를 병행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더 다듬은 셈이다.
트럼프 고등교육 협약에 대한 대학 반응. 그래픽=송정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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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의외로 세련된 정책을 들고 나온 2라운드에 도리어 역풍을 맞는 형국이다. 10일 매사추세츠공대(MIT)가 제안 거부 신호탄을 쏘자 15일 브라운대, 16일 서던캘리포니아대(USC), 펜실베이니아대, 17일 버지니아대, 18일 다트머스대, 20일 애리조나대가 줄줄이 가세했다. 첫 제안을 받은 9곳 중 7곳이 반기를 든 것이다. 해당 대학 총장들은 연방정부 보조금이 행정부의 우선순위 준수 여부가 아닌 학문적 우수성 등 자격에 따라 지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독립이나 학문의 자유를 포기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결정을 유보하고 추가 논의에 열려 있다고 밝힌 밴더빌트대도 자율성은 지켜야 할 가치라고 환기했다. 유일하게 일찌감치 서명 의지를 피력한 오스틴 텍사스대마저 실제 서명은 하지 않았다. 백악관 공보 담당자 리즈 휴스턴은 16일 “개혁에 동참하지 않는 고등교육기관은 정부와 납세자들의 지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조아리면 더 요구한다”
트럼프 행정부 고등교육 협약 주요 내용. 그래픽=송정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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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약의 요구는 광범위하다. △입학과 채용 과정에서 인종·성별 고려 금지(1·3항) △대학입학자격시험(SAT) 등 표준 시험 성적 제출 의무화(1항) △보수 사상을 처벌·폄하하거나 그것에 대한 폭력을 부추기는 부서의 폐지(2항) △기관 중립성 준수 및 직원의 정치적 견해 표현 제한(4항) △성적 과대 평가 억제(5항) △생식 기능에 따른 성별 정의(6항) △5년간 등록금 동결(7항) △외국인 학부생 15%로 제한(8항) △협약 준수 관련 학내 익명 여론조사(10항) 등이다.
그러나 실상은 실력보다 충성을 우대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고등교육 정책이 오히려 미국 고등교육의 쇠퇴를 부를 수밖에 없다는 게 중론이다. 인재 이탈 가능성 때문이다. 대학의 저항도 더 심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 보도 채널 MSNBC ‘레이철 매도 쇼’의 프로듀서 스티브 베넨은 “트럼프의 터무니없는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그가 계속 더 많은 것을 요구하리라는 것을 대학들이 학습하고 있다”고 21일 자신의 블로그에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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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러츠빌(미국 버지니아주)= 권경성 특파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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