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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5 (금)

    李에게 말한 것처럼…과연 재벌은 스타트업과 'AI 상생' 꾀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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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정연 기자]

    # 우리는 '사물의 경제에서 사고의 경제로' 1편에서 미국이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제1차 무역전쟁을 사실상 마무리하자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미국 빅테크 디지털 서비스 기업들을 대상으로 증세에 나선 사실에 주목했다.


    # 유럽의 디지털서비스세稅(DST·Digital Service Tax)는 글로벌 매출 7억5000만 유로 이상의 서비스 기업을 정조준한다. 사실상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빅테크 전용 세금이다. 프랑스 세법 개정안에도 "미국이 부과한 관세에 대응한다"는 문구가 삽입돼 있다(미국 컴퓨터·통신산업협회). 2편에선 한국의 서비스 경쟁력 얘기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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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3일 서울 코엑스 마곡에서 열린 제1회 산업 AI EXPO 참가 업체 클레비 부스에서 관계자가 피지컬 AI 장착 로봇 작동을 시연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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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지털세를 이익이 아닌 매출에 과세하는 이유는 항구나 공항 세관을 통과하지 않고 수출하는 디지털 서비스의 특성상 세금 회피가 쉬웠던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이익에 부과하는 법인세 등과 달리 매출에 부과하는 디지털세는 고의 적자 등으로도 회피할 수 없다.


    프랑스가 내년 1월 1일부터 디지털세 세율을 기존 3%에서 6%로 올리고, 이탈리아가 역내 매출 규모와 상관없이 광범위하게 과세하면, 미국 대 전세계의 제2차 무역전쟁은 바로 이 디지털 서비스 부문에서 벌어질 수 있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난 수십 년간 한국을 대표했던 단어는 수출이다. 우리는 지난해 6836억4600만 달러어치를 수출한 세계 8위 수출국이다. 수입액 기준으론 세계 12위다. 수출에서 수입을 뺀 무역수지 흑자는 518억9000만 달러로 세계 11위다(국제통화기금).


    그런데 우리는 상품 수출 대국이지, 서비스 수출 대국은 아니다. 시대에 따라 우리나라 주요 수출 품목이 가발, 섬유, 철, 가전, 자동차, 반도체와 같은 상품에서 게임이나 음악, 영화와 같은 서비스로 바뀌었다. 서비스는 교통편, 인터넷 서비스, 문화 상품, 지식재산권(IP)과 같은 무형의 것들이다. 공항이나 항만의 세관을 통과하지 않고도 수출할 수 있다.


    상품이 아닌 서비스 무역으로만 보면, 우리는 절대적인 약자다. 세계은행에 서비스 무역 통계를 제공한 199개 나라 중에서 한국은 8번째로 무역적자가 큰 나라다. 2024년 서비스 무역적자는 237억100만 달러다. 우리는 서비스 무역적자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중국과의 무역에서도 2022년 7억4000만 달러, 2023년 6000만 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한국이 상품 제조업에 지나치게 편중돼 성장해온 결과, 이제 와서 서비스 부문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다. 한국의 제조업 비중은 2023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27.6%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우리보다 제조업 비중이 높은 나라는 31.0%인 아일랜드가 유일하다. 대표적인 제조업 국가로 알려진 멕시코(21.7%)와 일본(20.7%), 독일(20.1%)과 비교해도 한국의 제조업 집중은 심각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강조되는 게 피지컬 인공지능(Physical AI)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0월 31일 경주에서 "공장 전체가 로봇으로 구동되고, 로봇이 로봇을 조작해 제품을 생산하는 게 바로 AI의 미래"라고 한국을 극찬했지만, 이는 피지컬 AI에 한정된다. 피지컬 AI는 결과적으로 공장 자동화의 하위 개념이다. 세계 최초로 산업 노동력의 10%가 로봇인 한국은 피지컬 AI의 최적 실험지일 수밖에 없다[※참고: 한국에는 AI가 빼앗을 일자리도 없다? OECD 보고서에 숨은 현실·더스쿠프·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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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AI는 결국 서비스다.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대표적인 생성형 AI인 챗GPT는 서비스이지 제조업이 아니다. 우리가 AI 학습에 주로 쓰이는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장을 확보한 일이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인지 강조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국가가 이중 5만 장을 공공 서비스 목적으로 확보하는 일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과감한 시도라고 해도, 이는 새로운 AI 서비스를 만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유럽이 미국 빅테크들이 주도하는 서비스를 전장戰場으로 삼은 것도 그만큼 AI 등 서비스 성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비스라는 제2차 무역전쟁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만약 우리 정부가 미국의 압박을 견디며 디지털세를 신설해 빅테크에 과세한다면, 영국과 프랑스의 디지털세 수입 7억~10억 유로 사이의 세수를 추가로 가져갈 수 있다. 금액으로는 1조5000억원 수준이다.


    하지만, 제2차 무역전쟁에서 디지털세는 하나의 무역 장벽에 가깝다. 아무리 높게 쳐줘도 미국의 관세 역할 정도다. 미국이 자국 내 제조업의 부활을 꾀했듯, 디지털세는 자국 디지털 서비스의 경쟁력을 지킬 가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유럽과 달리 우리 경제는 제조업 편중으로 마땅히 키울 만한 서비스가 부족한 게 사실이다. 과세가 정답이 아니라는 얘기다.


    다만, 지식서비스 분야에선 희망을 찾을 순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 3월 BOK 이슈노트를 통해 발표한 '우리나라 서비스 수출 현황과 나아갈 방향'이라는 보고서에서 "우리나라 지식서비스 분야 수출은 다른 나라들보다 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한국은 2010~2024년 전체 서비스 수출이 연평균 3.8% 증가했지만, 지식서비스 수출은 이보다 많은 13.4% 증가했다.


    하지만 이 통계를 그대로 우리 실력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지식서비스 수출의 54.0%가 지식재산권 사용료인데, 이중 62.0%가 대기업 등이 자신들의 해외 지사에 판매하는 연구개발(R&D) 기반 권리와 상표 및 프랜차이즈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영상 콘텐츠 수출에서도 한계가 있다. 지식재산권을 통으로 해외 OTT에 넘기는 방식이어서는 꾸준히 증가할 수 없다.


    결국 피지컬 AI를 과도기의 징검다리로 삼아서 가장 가치 있는 생성형 AI 서비스를 키울 시간을 버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수조원 자산가들이 정부에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면 달콤할 수밖에 없다. "AI 플랫폼을 만들어 스타트업이 함께 쓸 수 있도록 제공하겠다" "AI로 무장한 스타트업들이 함께 일할 수 있게끔 지원해달라" "중소기업, 스타트업, 학계를 지원하고 AI 활성화에 기여하겠다"….


    그런데, 말은 누가 언제 왜 했느냐에 따라서 맥락이 달라질 수 있다. APEC 정상회의 직후인 지난 10월 31일 재벌그룹 총수들이 이재명 대통령을 만나 부탁한 얘기라면 그 맥락을 좀 더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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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지난 10월 31일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린 APEC CEO 서밋에서 연설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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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리 색안경을 쓰고 볼 필요는 없지만, 그간 제조업 기반 대기업을 거느린 재벌그룹은 항상 대표 기업 간판만 바꿔 달면서 영업을 지속해 왔다. 19세기에 화장품을 만들던 회사가 중공업 회사가 되고, 곡물 소매업을 하던 회사가 로봇 만드는 회사가 되는 식이다. 전도유망한 스타트업을 제값 주고 인수하는 경우보다는 기술을 탈취해 오는 사례가 더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AI 붐을 타고 등장할 서비스 스타트업들을 재벌의 새로운 간판 정도로 격하해서는 곤란하다. 자본의 과도한 대기업 집중을 AI 등 기술 스타트업으로 분산시켜 질적인 성장을 이뤄야 한다. 34.7%에 불과한 한국 스타트업 5년 생존율을 미국(50.8%), 네덜란드(61.9%) 수준으로 올리는 것을 첫 목표로 삼는 것도 방법이다.

    한정연 더스쿠프 기자

    jeongyeon.han@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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